즈카르야(히브리어 זְכַרְיָה, ‘주님께서 기억하신다’)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가 부르는 새로운 노래인 ‘베네딕투스’(루카 1,68-79 참조)는 과거, 현재, 미래를 하느님의 충실성에 대한 비전으로 엮어 내는 기억의 찬가로 등장한다.
그의 아들 세례자 요한이 태어난 사건은 오실 분,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시작하는 복음의 문턱에 해당한다. 그런데 이 문턱에서 부르는 즈카르야의 노래는 단지 ‘그분의 길을 준비’하기 위해 태어난 아들 요한의 탄생을 기리는 것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노래는 하느님의 지속적인 구원 역사에 비추어 이스라엘이 걸어 온 역사,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을 향한 주님의 한결같은 자비의 역사를 기억하고, 재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침묵, 예언자의 목소리
“예언이란 하느님으로부터 자극을 받도록 자기 자신을 내어 맡길 때 나옵니다. 자신의 평정심을 다스리거나 모든 것을 통제할 때가 아닙니다. 내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내 마음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에 의해 자극을 받도록 우리 자신을 맡겨야만 나옵니다. 복음이 (우리의) 확신을 뒤집어엎을 때, 예언이 솟아납니다. 하느님의 놀라움을 여는 사람만이 예언자가 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20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강론 중)
사제로서 즈카르야의 삶은 전례, 성경, 그리고 정해진 직무의 순번에 따른 일상의 루틴대로 ‘무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루카 1,6 참조). 그런 그에게 대천사 가브리엘이 찾아오면서 이러한 일상에 균열이 일어난다. 자신의 나이 든 아내가 임신할 것이라는 탄생 예고를 천사로부터 전해 들은 즈카르야는 즉시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의구심을 제기하며 자신이 이해할 만한 표징을 요구한다.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그의 의심은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것’, 즉, 인간의 개념과 경험에 뿌리를 둔 이른바 ‘확실성’에 대한 집착이었다. 그러나 참된 예언이란 결코 우리의 생각이나 통제된 침착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경 안에서 예언의 진실성은 오히려 인간의 판단이나 계획이 하느님의 개입으로 인해 뒤집힐 때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낼 때가 많다.
이 점에서 천사가 강제한 즈카르야의 침묵은 단순한 징벌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받은 메시지가 신성한 것임을 보여 주는 표징이면서 동시에 그의 인간적 판단과 의심을 잠재움으로써 보다 심오한 예언적 사명을 준비시키는 은총의 시간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침묵은 이스라엘의 신적 기억에 깊이 참여하게 하며, 마침내 그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이루어진 구원의 미래를 선포하는 도구가 되도록 이끈다. 그리하여 말문이 트인 후, 놀랍게도 그에게서 나온 첫마디는 개인적 담화가 아닌, 구원자에 대한 찬미였다.
‘찬미하다’(eulogeō, 라틴어 benedīcere)라는 동사는 그 어원상 ‘좋게 말하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마치 ‘입안의 혀’처럼 다른 이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오히려 이런 식의 감언이설을 두고 주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라 이르시며 예언자를 통해 이렇게 비판하신다.
“그들은 먹을 것이 있으면 평화를 외치지만
저희 입에 아무것도 넣어 주지 않는 이들에게는 전쟁을 선포한다.”(미카 3,5)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성인이 된다.”라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처럼, 입속에 먹을 것만 넣어 주면 듣기 좋은 말을 마음껏 토해 내다가 뒤돌아서면 추악한 말로 올가미를 씌우는 ‘거짓 예언자’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을 심각하게 위협한다. 교회 안에서 진심 어린 축복의 말이, 이 세상과 내 형제들 안에 계신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찬미’가 그치고 오직 자신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한 ‘뱀의 혀’와 은밀한 ‘뒷담화’만이 난무할 때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믿음의 쇠퇴와 공동체의 영적 타락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즈카르야의 찬미는 그의 내면에서 인간적 불평과 의심을 넘어서는 영적 전환이 이루어졌음을 보여 준다. 이제 그의 시선은 자신이 처음 이해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구원의 지평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하여 한때 의심했던 것들(루카 1,13-17 참조)에 대해 이제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선포한다.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 백성을 찾아와 속량하시고
당신 종 다윗 집안에서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예로부터 말씀하신 대로
우리 원수들에게서,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입니다.”(루카 1,68-71)
부서진 역사 위에서 ‘새로움’을 노래하다
“우리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높은 곳에서 별이 우리를 찾아오시어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는 이들을 비추시고
우리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루카 1,78-79)
하느님께서는 그저 당신의 옛 언약을 ‘기억’만 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 몸소 당신의 백성을 ‘찾아오셨다’. 그러기에 그분의 구원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비록 지금은 어둠 속에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해도, 이미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어둠과 죽음의 그늘”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루카 1,78-79 참조).
의심에서 침묵으로, 그리고 예언의 노래로 이어지는 즈카르야의 여정은 하느님의 새로움에 초대된 우리 모든 믿는 이들의 여정이기도 하다.
구원은 신성한 놀라움으로, 우리가 가장 기대하지 않는 곳에서 마치 새벽이 밝아 오는 것처럼 찾아온다. 어둠 속에서 발견하는 희망과 새로움에 관한 전망은 하바쿡 예언자의 메시지를 떠올리게 한다.
“무화과나무는 꽃을 피우지 못하고
포도나무에는 열매가 없을지라도
……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하바 3,17-18)
여기서 ‘기뻐하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히브리어 âlaz (עָלַז)는 본래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지르는 함성을 의미한다. 이미 눈앞에 다가온 유다의 비극적 운명 앞에서도, 그들을 결코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의 계획을 믿고 기뻐하는 것.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희망의 지평이 아닐까? 희망한다는 것은 고통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구원을 이루시는 하느님의 주권을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때와 당신의 방식으로 지금도 우리의 역사 속에서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는 것, 이것이 새로운 노래를 부르도록 초대받은 우리에게 주어진 매일의 사명일 것이다.
의심에서 침묵으로, 그리고 찬미로 이어지는 즈카르야의 여정처럼, 우리의 삶에서도 하느님의 은총은 종종 예상치 못한 순간, 우리가 가장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불현듯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우리 안의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이사 58,9)을 멈추고, 침묵 가운데 하느님의 신비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찬미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