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삶

성경 이야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는 삶

그리스도 찬가, 카르멘 크리스티(Carmen Christi)

2025. 08. 20
읽음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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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armelite Sisters of the Most Sacred Heart of Los Angeles가 부르는 '오 예수의 마음이여'를 들으며 함께 읽어 보아요. (🔚 클릭해보세요!)


 

필리피서 2,1-11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닌 윤리적 차원과 구원론적 차원을 아우르는 바오로 신학의 정수를 보여 준다. 그중에서도 6-11절은 그리스도 찬가로 불린다. 이 찬가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바로 그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필리 2,5)라는 권고로 시작되는데, 과연 그리스도께서 지니셨던 마음이란 무엇인가?

 


 

케노시스(Kenosis): 지극히 인간적이며 또한 지극히 신적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이 찬가의 전반부는 하느님의 모습, 즉 하느님의 본성을 지니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적 특권을 주장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여기서 자신을 비우셨다”(heauton ekenōsen)는 표현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신성을 완전히 없애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이 도달해야 할 완전한 인성을 보여 주심으로써 하느님의 거룩함, 즉 당신의 신성을 온전히 드러내셨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인간됨의 극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8)라는 말씀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분의 죽음은 마치 존재의 가장 밑바닥처럼 공허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그분의 내려감은 결코 허무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필리 2,9)

 

여기서 그리스도의 올라감은 단순한 상실에 대한 보상이 아닌 그분 안에 있는 신성을 드러내는 계시의 순간이다.

 

비천함을 통해 드러나는 이 영광의 역설은 삼위일체의 내적 생명인 사랑의 계시, 즉 성자께서 인간의 연약함과 고통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데에서 드러난다. 그분의 내려감은 성부께 완전히 부정당하는 듯한 극한의 거리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시는 데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바로 이 극도의 낮아짐을 통해 성자께서는 하느님과 이웃을 향하는 이타적 사랑이 차지하게 될 드높은 영광을 가르쳐 주신다.

 


 

겸손, 인간의 길

 

하느님은 사랑으로, 사랑을 위해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와 사랑의 수단 외에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랑의 모든 형태를 창조하셨다.

하느님은 모든 가능한 거리에서 사랑할 수 있는 존재들을 창조하셨다.

그리고 하느님 그 최대의 거리, 즉 무한한 거리를 넘으셨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다른 존재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무한한 거리, 곧 하느님과 하느님 사이의 거리—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는 최고의 찢김과 고통, 사랑의 경이로움—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다.”

(시몬 베유의 《신을 기다리며》 중에서)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는 이러한 이타적 사랑을 일컬어, “주의를 기울임”(l’attention)이라 불렀다. 온전히 타인을 향해 헌신하기 위해 자신의 경험과 판단을 접어 두고 모든 관심을 기울이는 것, 이것이 삼위일체 하느님의 본성이자 인간 존재의 감추어진 거룩한 본성이다.

 

그러나 진정한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서는 로 가득 찬 내면을 비우고, 자신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바오로 사도가 신자들에게 권고한 말은 우리가 내면에 마련해야 할 이 공간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여 준다.

 

뜻을 같이하고 같은 사랑을 지니고 같은 마음 같은 생각을 이루어,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 주십시오. 무슨 일이든 이기심이나 허영심으로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필리 2,2-3)

 

겸손이란 단순히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이란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에서 시작되며, 마치 남의 꽃밭에 들어가듯 섬세하고 조심스럽게 다른 이들의 세상에 문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의 겸손이란 일상과는 다른 어떤 특별한 행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하루를 살아가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대할 때, 나의 말과 태도 속에서 ’(, 언행으로 남을 높이고 나를 낮춤)’(, 뒤로 물러남)을 실천할 때, 그 작은 순간들이 모여 우리가 주님 안에서 그분처럼 변화되는 공간이 된다. 그리고 이 변화의 여정 끝에서, 주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시는 날, 우리는 비로소 그분의 사랑 안에서 참된 우리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나무가 꽃을 떨구어야 열매를 맺듯, “하느님과 같아지고”(창세 3,5 참조), “우리의 이름을 날리려는”(창세 11,4 참조) 그릇된 욕망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우리는 거짓의 가면을 벗은 진정한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기심과 통제, 상처의 굴레에서 해방되어, 영과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흐르는 하느님 모상으로서의 자신 말이다.

 


 

지금 우리의 발걸음을 더디게 만드는 굴레는 무엇인가?

 

물질적 풍요에 대한 갈망 혹은 걱정, 인정 욕구, 성취에 대한 기대, 나만의 계획들. 물론 이러한 것들은 결코 그 자체로 무가치하지 않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모든 것을 통해 우리가 마땅히 도달해야 할 최종 목적지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 당신의 벗인 우리를 위해 당신의 영광을 내어 주신 케노시스의 사랑이라는 것이다.

 

한 컵의 물을 목마른 이와 나누는 것, 상대방도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믿어 주는 것, 경청하는 것, 한 번 더 친절을 베풀고 한 번 더 웃어 주는 것. 이 모든 것이 어제와 다를 바 없어 보이는 우리의 평범한 일상을 주님께 바치는 새로운 노래가 되게 하며, 우리가 넘어진 자리를 하느님과 만나는 거룩한 성소로 변화시킨다.

 

그렇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길이란 어떤 거창한 업적이 아닌, 이처럼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하는 것(마더 데레사 성녀Mother Teresa, 1910-1997)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는 거창한 신학 용어들로 설명할 수 있는 담론이 아니다. 그것은 겸손하신 당신의 마음을 지니고 너희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루카 10,37) 하고 말씀하시는 그분의 초대이다. 이를 다시금 마음에 새기며 성가 오 예수의 마음이여(O Cor Jesu)’의 한 구절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불러 본다.

 

오 예수의 마음이여!

당신의 몸과 피를 제게 주시며

풍성한 잔치를 베푸셨나이다

달콤하고 순결한 향내…

제 마음을 이 사랑 안에 사로잡으시어

거기에 영원히 머물게 하소서!

 

끝없는 찬미의 제대 위에서,

상처입은 옆구리에서 사랑은 하나가 되니

저는 당신의 것, 당신은 제 것이나이다……

 

오 예수의 마음, 타오르는 사랑이여!

저희의 마음을 당신 사랑으로 불태우소서!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지니신 분이여!”

(Carmelite Sisters of the Most Sacred Heart of Los Angeles)

 

 

 

Profile
한국순교복자 수녀회 소속으로 현재 로마 교황청립 성서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 살아계신 하느님의 음성이 인간 언어의 희미한 잡음을 넘어 선명하게 울리도록, 마치 오래된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조심스러운 손길과 눈길로 성경을 읽고, 되새기며, 이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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