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젊고도 늙었고, 어떤 사람은 늙어도 젊다.”(탈무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단순히 육체적 나이를 넘어, 인간의 영혼이 지닌 생동감과 감수성,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단순한 낙천성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희망과 믿음,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깨달음에 있다. 시메온의 노래(루카 2,29-32)는 바로 이러한 희망과 갱신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담고 있다.
희망을 거슬러 희망하며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만난 시메온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루카 2,29-32)
시메온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루카 2,25)로 묘사된다. 이는 그가 비록 나이가 많지만 그의 영혼만은 젊으며 오랜 풍파 속에서도 불구하고 여전히 구원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의 희망은 단순한 인간적 바람이 아닌, 성령께서 주신 약속에 근거한 것이었다.
“성령께서는 그에게 주님의 그리스도를 뵙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고 알려 주셨다.”(루카 2,26)
그가 성전에서 아기 예수를 보았을 때, 그 희망은 성취되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라는 그의 선언은 ‘지금’이 바로 한 사람이 평생을 기다려 온 약속의 성취를 체험하는 종말론적 순간임을 보여 준다. 시메온은 더 이상 먼 미래를 기다리지 않는다. 그는 이 갓난아기 안에서 이미 완성된 구원을 본다. 그가 본 것은 이스라엘의 영광이자 모든 인류를 위한 계시의 빛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노래한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 2,31-32)
이 구절은 하느님의 구원이 특정한 민족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한 것임을 선언한다. 선택된 이스라엘의 발걸음을 비추던 빛은 이제 모든 민족에게 확장되었다. 그리스도의 도래는 단순한 민족적 회복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향한 구원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꿈, ‘이미’ 그러나 ‘아직’의 경계 위에서
시메온의 노래는 절망의 한가운데서도 “꿈을 꾸는 노인”(요엘 3,1)이 부르는 새로운 노래다. 노인의 꿈은 ‘희망에 의해 움직이는 삶’이기 때문에, 그 삶이 현재의 한계나 육체의 연약함에 의해 정의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런 다음에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영을 부어 주리라. 그리하여 너희 아들딸들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환시를 보리라. 그날에 남종들과 여종들에게도 내 영을 부어 주리라.”(요엘 3,1-2)
노인들은 과거에 안주하거나 무기력하게 굴복할 것이라고 여겨진다. 그러나 노인들 또한 하느님 나라의 꿈을 꾸도록 초대받는다. 하느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이 열어 가시는 구원의 미래를 마음 깊이 그리도록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 기쁨은 늘 해산의 고통, 곧 ‘십자가의 무게’를 동반한다는 점이다.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한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4-35)
마리아의 영혼을 찌른 칼은 구원을 향해 가는 길에 감내해야 할 고난을 상징한다.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영광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그릇된 악습을 버리는 수고로움과 상처, 그리고 결단을 요구한다.
과연 나는 부활의 영광에 이르기 위해 매일 나의 십자가를 온전히 지고 가는가? 세상의 냉소와 조롱 앞에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치고 있지는 않은가?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넘어지게도, 일어서게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분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동시에 우리의 병든 곳을 치유하고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는 분이다. 그러기에 때로는 외과의사의 칼처럼 아프지만 필요한 수술을 하시는 분이시다. 구원의 기쁨은 그 존재의 변화에 수반되는 고통과 결코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다. 참된 평화는 고통을 비겁하게 피해 가지 않고, 부활의 믿음 안에서 담대히 그 고통의 과정을 통과한다. 그리고 그 길 끝에는, 하느님께서 마련해 두신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어둠 속으로 가져오신 그 촛불이 평온하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하시고…….”
독일 개신교 신학자인 본회퍼(Dietrich Bonhoeffe, 1906-1945)는 나치에 의해 처형당하기 불과 몇 달 전인 1944년 겨울, 그의 새해 인사이자 마지막 인사가 된 옥중 편지를 가족들에게 보냈다. 이를 개사한 독일 성가는 우리에게 <선한 능력으로Von guten Mächten>라는 제목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선한 능력에 고요히 둘러쌓여 보호받고 위로받는 이 놀라움 속에서
그대들과 함께 이날들을 살아가고, 그대들과 함께 새로운 한 해를 맞길 희망합니다.
지나간 것들이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산란하게 하고,
어두운 시절의 무거운 짐은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지만,
아, 주님! 두려움에 떠는 저희 영혼에 당신께서 마련하신 구원을 보내 주소서.
고난의 잔이 쓰디쓴 고통으로 넘치도록 채워진다 할지라도
당신의 선하신 사랑의 손에서 두려움 없이 감사히 그 잔을 건네받겠습니다.
그럼에도 한 번 더, 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쁨과 눈부신 햇살을 허락하신다면
저희는 지난날을 기억할 것이며, 그때에 저희의 모든 삶은 온전히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의 어둠 속으로 가져오신 그 촛불이 평온하고 따뜻하게 타오르게 하시고,
저희를 다시 하나 되게 하십시오.
당신의 빛이 밤에도 빛나고 있음을 저희는 압니다. ……
선한 능력으로 놀랍도록 보호받고있기에, 우리는 의연히, 다가올 일들을 기대합니다.
주님께서는 밤이나 낮이나 우리 곁에 계시며,
다가올 모든 새로운 날들에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구원의 신비를 알아보는 눈을 지니고 있는가? 나 자신의 힘이 아닌, 굽은 길조차 곧게 하시는 분의 섭리를 믿으며 폭풍 속에서도 고요한 평화를 누리는가?
때로는 눈앞의 어둠이 너무 짙어서 희망이 보이지 않고, 기다림이 지치도록 길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꿈을 꾸며 떠나가는 노인 시메온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향한 희망을 놓지 말라고. 어둠 속에서도 그분이 비추시는 빛을 발견하라고, 그리하여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이 구원의 현실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이다.
몸은 비록 나날이 저물어 가도, 우리의 영혼은 밤의 어둠을 밀어내는 동틀녘의 빛을 언제나 간직하길……. 그리하여 그분으로 가득 채워질 세상을 꿈꾸며 우리의 삶과 죽음을 온전히 그분의 선하신 손길에 내어 맡길 수 있기를 함께 기도하며, 오늘도 시메온의 노래로 하루를 마친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이제는 주님의 종을 평안히 떠나가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