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를.
땅끝에서부터 그분께 찬양을 드려라.
바다와 그를 채운 것들, 섬들과 그 주민들은
소리를 높여라.”(이사 42,10)
고대 근동에서는 군사적 승리나 왕의 대관식과 같은 큰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새로운 노래’를 작곡하곤 했다. 하지만 이사야가 이 예언을 선포할 당시 유다는 이와 정반대의 현실에 직면해 있었다. 외세의 침략, 미신, 종교적 혼합주의로 인한 영적 타락으로 회복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하느님 백성이 부르는 ‘새로운 노래’는 희망이 사라진 상황에서도, 우리의 생각과 다른 방식으로 구원을 위해 일하고 계신 하느님의 섭리를 신뢰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이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우리 안에서 시작되었고, 아직 미완의 상태로, 만물의 회복을 가져오실 그분의 다시 오심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것이 신약을 관통하는 구원의 메시지다. 이제 신약이 전하는 ‘새로운 노래’의 첫 번째, 루카가 전하는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를 살펴보자.
성모님의 노래, 마니피캇(Magnificat)
우리에게 ‘마니피캇’이라는 제목으로 더 잘 알려진 마리아의 노래(루카 1,46-55)는 하느님의 은총이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 곧 ‘취약한(vulnerable)’ 이들을 위한 것임을 선포한다. 프랑스 작가 샤를 페기Charles Péguy는 인간의 취약성이 지닌 의미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큰 죄인의 영혼에서 뜻밖의 승리를 거두는 은총이, 정작 정직하다는 사람들,
혹은 올바른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는 종종 무력해지고 마는 것은,
이른바 ‘올곧은’ 사람들
— 실제로 그런 사람이든, 아니면 단지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고
자신도 그렇게 불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든 간에 —
그들의 갑옷에는 ‘틈’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상처를 입지 않는다.
늘 흠 없이 유지된 도덕이라는 피부가
그들에게는 완전한 가죽과 갑옷이 된다.
그들은 은총이 들어갈 수 있는 틈을 조금도 보여 주지 않는다.
이 ‘올곧은’ 사람들은 은총에 젖어 들지 않는다.”
(샤를 페기, 《데카르트와 데카르트주의 철학에 관한 메모》, 파리, 1935)
마리아는 자신의 위대함이 아니라, 자신의 비천함에 하느님의 충만함이 머물게 되었기에 기뻐한다. 은총은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이들, 자신을 비운 이들에게 넘치도록 부어진다. 이것이 마니피캇이 보여 주는 은총의 역설이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6-48)
여기에 사용된 그리스어 doulē(여종), tapeinōsis(비천함)는 자신의 약함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마리아의 투명한 시선을 보여 준다. 자칭 ‘올곧은’ 이들이 인간의 관습과 도덕의 갑옷을 입고 은총을 거부하는 것과 달리, 마리아는 자신의 가난과 비천함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 앞에 열어 보임으로써 그분이 들어오실 자리를 마련한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2-53)
도덕적 확신과 사회적 지위로 자신을 보호하는 이들은 하느님의 강한 팔에 의해 밀려나고, 상처받고 업신여겨지던 이들이 일으켜 세워진다. 굶주린 이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기에 하느님께서 좋은 것을 채워 주시지만, 스스로 부유하다고 믿는 이들은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그들은 하느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하느님의 도우심’이란 그저 진부한 신앙의 클리셰일 뿐이다.
종의 비천함을 통해 도래하는 하느님의 은총
마니피캇은 단순한 위로의 노래가 아니다. 내세에서 이루어질 막연한 보상을 꿈꾸며 현실의 부조리를 묵묵히 견디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부터 비천한 이들을 통해 인간의 교만과 억압의 구조를 해체하시는 하느님의 논리와 활동을 선포하는 예언자의 노래다.
사실, 마리아가 살던 시대는 오늘날의 부조리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권력자들은 자신의 이익에 몰두했고, 부자들은 가난한 이들을 착취했으며, 약자들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더욱이 과도한 율법주의 속에서 율법을 지키지 못한 이들은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와 같은 소위 ‘올곧은’ 이들에 의해 죄인으로 낙인찍혀 사회적으로 소외되기 십상이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마니피캇이 보여 주는 거룩한 ‘역전’의 비전은 취약한 이들을 먼저 선택하시는 하느님의 연민을 통해 실현되는 참된 정의에 대한 믿음이다. 마리아의 영혼을 가득 채우신 성령께서는 이 앳된 여인의 입을 통해 이렇게 선언하신다.
하느님은 취약한 이들을 돌보시는 분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취약함을 통해 온 세상을 변화시키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흔히, 우리 자신이 어떤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을 때, 가령 모두가 우러러볼 시상대에 올라 소감을 발표할 때와 같은 특별한 명예를 얻었을 때야말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은 모든 피조물의 존재 자체에서 드러나며, 심지어 우리의 ‘취약함’ 안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아름다움은 사랑이 두려움보다 강하고, 자비가 판단보다 강하며, 그분께 두는 희망이 결코 우리를 실망하게 하지 않는다는 확신이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신앙이란 스스로 우리의 약함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이며, 사랑하기에 스스로 불리한 입지를 선택하는 수고로움을 감수하는 것이라 하겠다.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눈
다시 이사야 42장으로 돌아가 보자. ‘새 노래를 부르라’는 초대는 주님의 종(이사 42,1-9)에 관한 예언을 감싸고 있는데, 이는 주님의 종을 통해 도래하는 하느님의 통치가 바로 그들이 ‘새로운 노래’를 불러야 할 근본적 이유임을 알려 준다. 희망은 ‘보이는’ 현상이 아닌, 우리의 가난한 역사를 ‘가장 은혜로운 때’로 만드시는 분의 ‘보이지 않는’ 은총을 믿는 데에서 시작한다.
보이는 것에 연연하고, 뒤틀리고 굳어 버린 자기 내면을 고백하기를 두려워하는 한, 우리는 이미 우리 곁에 와 계신 치유자를 깨닫지 못할 것이다. 마리아의 노래는 우리를 초대한다.
“두려워 말고 네 빈손을 들어라.
내가 너의 빈손에 세상을 구원할 희망을 채우리라.”
마니피캇은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가난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노래다. 이 새로운 노래는 우리의 결핍과 비천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들어오실 은총의 통로로 인식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남들보다 더 ‘잘난’ 사람이 되려는 무한 경쟁 속에서, 거짓된 자아와 자기선전의 피로감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 그분의 은총을 받아들일 때, 우리도 마리아와 함께 ‘가난한 사람(아나뷤anawim, 시편 37,11; 루카 6,20 참조)’의 행복을 이렇게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루카 1,4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