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노, 하느님의 거룩한 도구로 승화된 삶

영성과 신심

아우구스티노, 하느님의 거룩한 도구로 승화된 삶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회심하고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2025. 08.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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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8일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축일입니다. 

이날은 출판인의 수호성인을 기억하는 날로, 가톨릭출판사의 창립 기념일이기도 하죠.
이달에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삶과 영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함께 나눠 보려 합니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 로마 신학원에서 치른 미사의 독서가 마음에 와닿았다. 부끄럽지만 보통 필자는 이탈리아어로 하는 미사에서 독서와 복음 말씀을 피상적으로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날은 그렇지 않았다.

 

제가 다시 한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창세 18,32)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을 앞둔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간청하는 장면은 매우 감동적이다. 그는 몇 명의 의인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징벌을 거두어 달라고 빌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악인들의 도시를 지키려고 하느님께 거룩한 흥정을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그가 왜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 불릴 수 있는지를 실감케 한다. 결국 아브라함은 50명부터 시작해서 45, 40, 30, 20명을 거쳐 단 열 명만이라도 의인을 찾을 수 있다면 성읍을 파멸시키지 않겠다 하시는 하느님의 약속을 받아내고야 만다.

 

어쩌면 이 과정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치유하시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순응하여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이미지(창세 22)가 너무 강해서 그를 믿음의 대명사라고 여기곤 한다. 그러나 사실 그가 하루아침에 이 모든 민족의 모범, 믿음의 아버지가 된 것은 아니었다. 한때 그는 자손을 일으켜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하고 하가르를 몸종으로 삼고, 그렇게 아들을 낳아 준 하가르와 본처인 사라의 갈등 사이에서 가장답지 않은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인다든지(창세 16), 이집트 재상이 두려운 나머지 사라를 자신의 누이라고 속이는 등(창세 12, 20) 믿음과 리더십에서 부족한 면을 보여 준 적도 있었다.

 

그러나 늙은 나이에 이를 때까지 자손을 갈망해 왔음에도 품에 아이를 안지 못했던 아브라함의 내면에는 자손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이 사무쳐 있었으니, 이는 한 가정을 떠나온 인류의 아버지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의 토대가 되었다. 하느님 앞에 무례해 보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한 성읍을 구하기 위해 계속해서 그분께 매달리는 모습은 그가 지닌 부성(父性)의 잠재력을 한껏 끌어올려 주시려는 하느님의 배려가 아니었을까? 자기 자손에 대한 사무친 애정이 온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씨앗의 숨을 막지 않으시고, 오히려 잘 가꾸셔서 거룩한 열매가 맺어지길 원하신다. 본래 철은 그 자체로 선하거나 나쁘지 않다. 이 철이 쟁기가 되면 수천 명을 먹여 살릴 훌륭한 농기구가 되는 것이고, 반대로 흉악한 무기가 되면 반대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는 것이다(이사 2,4; 미카 4,3). 성경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이러한 진리를 우리에게 잘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형 에사우의 발뒤꿈치를 잡았던 야곱의 손을(창세 25,26), 하느님의 샅바를 잡고 그분께 매달리는 손으로 바꾸어 주셨고(창세 32,25),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사울의 불같은 열정을, 수많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불타는 열정으로 바꾸어 주셨다. 하느님께서는 야곱의 쟁취욕을 꾸짖으시거나, 바오로의 열정을 꺼뜨리지 않으셨다. 다만 그 기질을 거룩한 방향으로 승화시켜 주셨다.

 

오늘 살펴볼 아우구스티노 성인 역시 그렇다. 그리스도교 교부 중 가장 많은 저작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지만, 오늘날 최고의 스승으로 존경받을 때까지 그는 오랫동안 방황했다.

 


 

오랫동안 방황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삶

 

아우구스티노는 서로마 제국이 지중해 연안을 통일하고 더 이상 식민지가 생겨나지 않는 시기에, 귀족들의 사치가 극에 달해 빈부 격차 등 사회적 혼란이 지속되고, 이후 콘스탄티노플 대제가 그리스도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여 교세가 확장되는 시기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던 북아프리카 타카스테는 당시 이단이 성행했던 곳이었고, 여기에는 선신과 악신을 두는 마니교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총명했지만, 세상의 모순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기질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학생들에게 엄격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뒤에서는 유희를 즐기는 선생님들에게 실망하여 학교를 등졌다. 반항심이 가득했던 그는 타카스테의 골목대장이 되었고, 이에 걱정이 앞선 어머니 모니카 성녀는 그를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낸다.

 

그는 유학 시기 중 자신이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집단 도둑질을 하기도 했고, 청소년기의 육욕을 잠재우지 못하고 아데오타두스라는 아들을 낳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아들을 얻고 난 뒤에는 다시 공부에 몰두하였고 이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책에서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이 단어는 오늘날의 철학의 어원이 된다)이라는 단어를 보고 마음에 간직하게 된다.

 

자의식이 충만했던 그는 성경 역시 비판적으로 읽었다. 그러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성경에서 찾지 못하고 마니교에 빠져 버렸다. 마니교는 선신과 악신의 투쟁이라는 교리를 기본으로 한다. 육욕에 빠져 죄를 지어 양심의 가책을 느낄 때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악행을 악신의 책임으로 전가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니교 교리에서 위안받은 것이다.

 

이후 수사학 교사가 된 아우구스티노는 선과 악의 문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계속해서 골몰했다. 그러던 중 암브로시오를 만나 삶의 전환점을 이루게 되었다. 본래 아우구스티노는 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암브로시오를 공격하기 위해 황제에게 파견되어 밀라노에 갔던 터였는데, 오히려 암브로시오의 탁월한 인품과 설교에 반해 버린 것이다. 이 만남에서 암브로시오는 성경은 문자적인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되고, 그 안에서 영적인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라는 현대적인 관점으로도 놀라울 정도로 선구적인 가르침을 전했다. 이에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이 성경에 대해 가졌던 의문을 해소하고 세례를 받게 되었다.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를 만나고 신플라톤주의를 공부하며 그의 인생은 새로운 막으로 진입했다. 비록 여기에서도 내면의 공허함은 때때로 그를 괴롭혔지만, 암브로시오가 추천해 준 바오로 사도의 서간, 특히 갈라티아서를 읽으며 영과 육의 싸움에 대해 설명하는 바오로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 이 둘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없게 됩니다.”(갈라 5,17)

 

이후 로마서 13장을 읽으며 자신을 괴롭혔던 욕망에서 회심하여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된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로마 13,12-14)

 

그 뒤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을 괴롭혔던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평생을 투신하게 된다. 그리고 선과 악의 문제(자유의지론), 삼위일체 하느님은 어떤 분이시며,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삼위일체론), 죽음 이후에는 어떤 삶이 있는지, 개인의 공동체가 무엇이며 참다운 정의와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인지(신국론) 등의 대작을 남기며 가톨릭 교회 사상의 중심축을 형성하였다.

 


 

우리 역시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회심하고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아우구스티노의 삶, 그의 내면에 존재했던 자의식과 죄의 상처, 회의주의와 절망이 되레 교회 사상의 거룩한 도구로 승화하는 과정이라 불릴 만하다. 하느님께서는 비록 그가 젊은 날 방황하였지만, 그 안에도 선의 잠재력이 있음을 아셨던 것이 아닐지. 우리 역시 그렇다. 나의 잘못된 과거와 현재에도 이어지는 결점과 약점. 나의 그릇된 가치관과 욕망을 그분께 내어드리고, 그분께서 거룩하게 이 기질을 사용하시도록 청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 역시 아우구스티노 성인처럼 회심하고 새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소돔과 고모라의 이야기에 나타난 의인과 악인들은 인간 내면에 있는 선과 악의 비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저 아이를 살려 주십시오. 저 아이가 비록 악해도, 그 안에 50만큼의 선이 있다면…… 30만큼의 선이 있다면…… 10만큼의 선이 있다면 그를 파멸시키지 말아 주십시오.” 하고 매번 간청하시지 않을까? 그분께서는 다른 부분에서도 끝까지 이 결점투성이인 포도나무를 기다려 주시니 말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루카 13,6-9)

 

주님,

제 부족함, 제 결점, 제 약점을 당신께 바치오니

거룩한 당신 계획의 도구로 써 주소서.

 


 

* 이 글의 아우구스티노 생애 관련 부분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삶의 길을 묻다》를 참고하였습니다.

 

 

Profile
인천교구 사제. 현재 로마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담긴 메시지를 연구하는 것이 제 주된 일이지만, 그것을 넘어 교회 안에는 세속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랑과 배려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능한,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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