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록》, 어떤 책일까?

영성과 신심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고백록》, 어떤 책일까?

20세기 대표 신학자 과르디니와 함께 읽는 《고백록》

2025. 08.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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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 28일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축일입니다. 

이날은 출판인의 수호성인을 기억하는 날로, 가톨릭출판사의 창립 기념일이기도 하죠.
이달에는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삶과 영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는지 함께 나눠 보려 합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가톨릭 교회의 위대한 성인, 교부학의 거장 중 한 사람이다. 철학과 호교론, 성경 주석은 물론 교의학과 윤리학, 사목학 저작을 남겼으며, 그중 《고백록》은 서양 그리스도교 고전 중 하나로 꼽힐 만큼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단순한 회고록을 넘어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통찰과 신학적, 철학적 탐구를 담고 있어 중세 시기 이후에 많은 철학자,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을 20세기 가톨릭을 대표하는 신학자, 로마노 과르디니가 다시 살펴본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고군분투하며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담은 이 책을 과르디니는 어떻게 읽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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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과르디니와 함께 고백록 읽기》(2025년 출간 예정)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고백록》은?

  • 형식: 자서전. 하느님께 고백하듯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독특한 문체가 특징!
  • 내용: 청년 시절의 방탕한 생활을 돌아보고, 그리스도교로 회심하기까지의 여정을 솔직하게 담은 이야기
  • 주제

①인간의 죄와 하느님의 은총 

②내면 성찰과 참행복 추구 

③시간, 기억, 영혼에 대한 철학적 사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아우구스티노의 증언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책을 《고백록(Confessiones)》이라고 부른다. 이 말의 어원이 되는 라틴어 동사 콘피테리’(confiteri)하느님을 인정하다, 공식적으로 고백하다, 선포하다, 찬양하다를 뜻한다. 이 용어는 내면의 예비적 태도에서 공개된 영역으로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발걸음은 《고백록》에서 종교적인 의도로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그의 고유한 삶과 행위는, 자신의 태도와 영적 투쟁에서처럼 공개적으로 드러난다. 이는 경건하게 하느님 앞에서 이루어지면서도 사람들이 들을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고백록 안에서 이 고백의 의미에 대해 여러 번 면밀하게 검토한다.

 

보십시오, 당신은 진리를 사랑하십니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만이 빛으로 나가기때문입니다. 저는 진리를 행할 것입니다. 고백을 통해서는 당신 앞에서 저의 마음으로 행하고, 저의 글을 통해서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행할 것입니다.”(10,1,1)

 

그다음에는 이렇게 이어진다.

 

그러나 주님, 인간 양심의 심연마저도 당신의 눈에는 벌거벗겨져있는데, 하물며 제가 당신에게 고백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도 제 안에 무엇인들 당신에게 숨겨질 수 있겠습니까?”(10,2,2)

 

하느님께서는 고백하지 않아도 알고 계신다. 인간이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고 저항하더라도, 그분은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 보신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그분의 인식은 당신 피조물의 본질을 근거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것을 인식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것을 인식하시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창조적인 인식을 통해서 진리는 참되며, 그분의 뜻을 통해서 피조물은 본질과 고유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동시에 하느님의 인식은 정의롭다. 이 인식은 당신이 세우신 본질적 진리의 척도에 따라서 피조물을 판단하는 행위이다. 그분의 시선은 판단하고, 거부하며, 확인한다. 그렇다면 고백은 피조물이 자발적으로 하느님의 진리 안에 자신을 놓아두는 행위이다. 이제 이 고백은 어떤 한계도 없는 눈길로 보시는 그분에게 실제로 알려질 뿐만 아니라, 그분에 의해서 알려지기를 원하게 된다. 고백은 자신의 수치심과 자기주장의 저항 속에서도 진리를 인식하시는 하느님 능력과 결합된다.

 


 

고백, 하느님 앞에 나아가려는 영혼의 노력

 

고백과 반대되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닫으려는 의지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피조물도 꿰뚫을 수 없는 알 수 없는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으시다. 그분은 당신 자신 안에서 자신의 개방성을 지니고 계신다. 거기서 아버지의 영원히 발설된 말씀인 아들 안에 아버지가 열려 있고, 발설하는 것과 발설된 것은 영이며 그는 연결nexus이자, 입맞춤osculum인 사랑의 무한한 내밀함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외부로는 당신 자신을 숨기고 계시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흡족할 때에만 말씀하신다. 인간은 다른 사람에게서 자신을 감출 수 있으며, 때로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처신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어 고백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분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신다. 자신을 드러내어 고백하지 않으려는 거부는 자유 의지로 의도할 수 있겠지만, 이러한 의도 자체가 결국 하느님에 대한 반항이 된다.

 

따라서 하느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은 피조물인 인간이 본래 자신의 존재를 만드시고 자신의 적나라한 실체를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인식 속으로 자신을 놓는 행위이다. 이 행위를 통해 인간은 자신을 판단하시는 하느님의 인식을 받아들이고 이 인식과 결합된다.

 

아우구스티노는 《신국론》에서 육체의 생명이 영혼인 것처럼, 인간의 지극히 복된 생명은 하느님이다.”(19,26)라고 말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만 본질적으로 충만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백은 진정한 의미에서 결정적인 본질의 성취와 실현을 찾기 위해서 하느님 앞에 나아가려는 영혼의 노력이다.

 


 

아우구스티노는 심장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는 자신을 사랑했고 자신의 삶을 사랑의 힘 아래 두었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마음의 영역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했다. 이 마음은 하느님 안에서 안식을 누릴 때까지는 쉬지 못하는’ ‘하느님을 향하도록 창조된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아우구스티노의 회심은 하느님의 사랑이 모든 것을 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이는 자신의 존재와 삶이 끊임없는 하느님의 작용에서 비롯되었다는 의식에 대한 확신이다. 사랑의 하느님은 당신 자신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한순간도 창조하기를 멈추지 않으시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전 존재가 그분에게 의존하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깨달음을 고백하고 하느님에게 항복하는 것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김형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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