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닮은 성경 속 인물, 아브라함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과연 어떤 인물일까? 그들은 특별한 인간일까? 그러나 성경을 읽고 묵상해 보면 성경 속 인물들도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지닌 사람,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모두 인간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고,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니라 우리처럼 울고 웃고 분노하고 때로는 죄 속에서 몸부림치는 나약한 이들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로와 통찰을 건넨다.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도 그런 인물 중 하나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을 때, 그의 마음은 어땠을까? 그는 솔직히 두렵고, 떠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수없이 “하필 왜 제가 가야 합니까?”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부르심은 도저히 거역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하느님의 첫 부르심은 “고향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가라.”였다. 지금까지 살아온 땅과 부모와 친구를 다 버리고 떠나라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마치 죽음과 같은 일이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머물렀던 땅에 관해 살펴보자. 성경에서는 아브라함이 노아의 맏아들 셈의 후손으로, 그의 고향은 ‘칼데아의 우르’라고 가르쳐준다(창세 11,10-32참조). 또한 아브라함 가족이 칼데아의 우르에서 가나안을 향하여 길을 떠나다가 하란에 이르러 그곳에 자리 잡고 살았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칼데아의 우르라는 지역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지역이었는지 성경에 전혀 언급이 없다.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는 오늘날 이라크 지방으로, 남부 유프라테스강 가까운 곳에 있는 수메르의 도시 국가였다. 수메르는 기원전 3000년경에는 세계 최고의 문명을 누린 지역으로, 당시 우르는 가장 발전된 도시였다. 그런 문명 도시를 뒤로하고 떠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죽음에 가까운 행위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믿음을 위대하게 여겨 높이 추앙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약속하시다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창세 12,2)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의 자손이 하늘의 별만큼 늘어날 것이라고 하시며 가장 큰 민족을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만을 굳게 믿고 하느님께서 시키신 대로 고향을 떠났다. 그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을 떠난 것은 75세 때의 일이었다(창세 12,4). 당시 아브라함에게는 아들 한 명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아브라함 부부는 자손을 보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고대 사회에서 자식이 지니는 의미와 가치를 고려할 때, 아브라함은 좌절하거나 체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년의 나이에도 새로운 미래를 향해 과감히 발을 내디뎠다.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 그러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흔히 신앙생활을 해 나갈수록 그 세월에 비례해 믿음이 커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 신앙은 정말 보잘것없다. 태풍에 폭풍우가 오고, 뿌리째 큰 나무들이 뽑혀 넘어지는 것처럼 믿음이 아무리 깊고 투철한 것처럼 느껴져도 세속적 유혹이 계속 다가오면 뿌리째 뽑히기 십상이다. 유혹은 우리의 가장 큰 약점을 깊이 파고들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시련을 겪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고향을 떠난 아브라함은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차츰 네겝 지방으로 옮겨 갔지만, 얼마 후 그 지방에 기근이 들어 다시 식구들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첫 번째 시련을 맞이한다. 이방인의 지역에서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자신의 누이로 속인 것이다(창세 12,10-20 참조). 그렇게 사라는 파라오의 궁전으로 불려 갔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기 위하여 파라오와 그 집안에 여러 가지 큰 재앙을 내리시며, 그들을 파라오의 손에서 구해 내신다.
그 뒤에도 아브라함은 큰 잘못을 저질렀다. 하느님의 약속을 기다리지 못한 것이다. 당시는 남성 중심 사회였기 때문에 자손을 통해 대를 잇는다는 것은 삶의 의미이자 명예였다. 따라서 사라는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하는 현실 앞에서, ‘하가르’라는 이집트 여종을 골라 아브라함에게 아내로 주는 결정을 했다. 그녀는 소실을 선택하기 전 갖가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가르는 마음씨도 곱고 자기 말을 잘 들으니, 나중에 아이를 낳더라도 변하지 않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아브라함은 사라의 뜻대로 하가르와 동침하여 아이를 잉태한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하가르는 아들을 잉태하자 사라를 멸시했고, 사라는 깊은 배신감에 시달렸다. 결국 임신한 하갈은 비참하게 내쫓겼고 아브라함과 사라에게도 남은 건 상처뿐이었다.
그런데 사라의 근본적인 불행의 원인은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않은 것이었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생기지 않는다고 초조한 나머지 여종인 하가르를 소실로 들인 사실에서 알 수 있듯, 단지 인간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 화를 자초한 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하가르에게서 아들을 얻었지만,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하가르 모두 끔찍한 고통과 아픔을 경험했다. 인간 중심의 생각, 욕심대로 살려고 하면 점점 더 고통의 늪으로 빠진다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것이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