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는 것

영성과 신심

십자가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는 것

순교자 성월에 읽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

2024. 11. 27
읽음 44

 

십자가는 본래 형벌 기구였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활을 통해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의 중요한 상징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 걷기 위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를 함께 읽어 보자.

 


 

오늘 복음은 예수님 생애 마지막 즈음에 있었던 일화를 전해 줍니다. 이 사건은 히브리인들의 파스카 축제를 지내기 위해 가셨던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당시 그곳에는 이 종교적 의례에 참석하기 위해 온 몇몇 그리스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유대 민족의 신앙에 이끌려 그 종교적 감흥에 추동된 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위대한 예언자에 대한 전언을 들은 뒤 열두 사도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필립보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님을 뵙고 싶습니다.”(요한 12,21)

그런데 여기에서 요한 복음사가는 ‘보다’라는 동사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에는 겉모습을 넘어 한 인격의 신비를 파악하려는 의미도 담겨 있죠. 요한이 구사하는 ‘보다’라는 동사는 시각적 차원과 함께 마침내 마음에 이르고, 이해하게 되며, 결국에는 한 사람의 내면에까지 이르게 되는 겁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반응도 놀랍기만 합니다. 그분은 가타부타 설명하지 않으시고, 다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요한 12,23) 이 말씀은 얼핏 보기에 그리스인들의 요청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답을 주신 셈이죠. 왜냐하면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이는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십자가 안을 살펴야만 하니까요. 네, 십자가의 안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하여 오늘 복음은 우리의 시선을 십자가로 이끕니다. 장식품이나 장신구로서가 아닌, 십자가 그 자체로 말이죠. 때때로 십자가는 이런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은 묵상하고 이해해야 하는 종교적 표징으로서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초대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하느님 아드님의 죽음의 신비로서 궁극적 사랑의 실천을 드러내 보여 주시니까요. 그것은 모든 세대와 온 인류를 위한 생명과 구원의 원천입니다. 그분의 상처로 우리는 치유됐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우리는 그 안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기도를 할 때 주님의 다섯 상처는 아주 좋은 묵상거리입니다. 곧,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예수님의 상처들을 통해 그 안으로, 그분 마음 안으로 들어가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신비에 대한 위대한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의 위대한 지혜를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은 다음의 예시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그분은 당신의 극적인 사명인 죽음과 부활이 하나의 열매를 맺는 행위임을 이해시키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치유하는 그분의 상처, 곧 그분의 수난은 많은 열매를 내어 주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써 새 생명을 키우는 밀알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은 강생하셔서 이 땅에 오셨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들을 죄의 노예살이로부터 해방하고 그들에게 사랑으로 화해한 새로운 생명을 주기 위해 죽으셔야만 했습니다. 지금 저는 ‘사람들을 구속하기 위해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란, 바로 나, 그대, 우리 모두를 뜻합니다. 그분은 이런 값을 치르신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상처들을 보고 그 안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그 내면을 말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밀알의 이러한 역동성은 그분의 제자들인 우리 안에서도 실현되어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는 생명을 잃음으로써 영원한 새 생명을 얻는다는 이러한 부활 법규를 실천하라고 부르심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다시 말해, 밀알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것은 자신이나 자신의 관심사에 대한 생각을 줄이고 대신에 우리 이웃들과 특별히 보다 작은 이들의 필요들을 볼 줄 알고, 만나러 갈 줄 안다는 뜻입니다. 영육 간에 고통받는 이들에게 기쁘게 실천하는 애덕 행위는 복음으로 살아가는 확실한 방법이니까요. 아울러 이는 우리 공동체가 형제애와 상호 간의 환대 안에서 성장할 수 있게 하는 필수적인 토대이기도 합니다.

 

이에 저는 예수님을 뵙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 내면을 보고 싶습니다. 그분 상처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그분 마음속의 바로 그대를 향한, 나를 향한, 우리 모두를 향한 그 사랑을 함께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베들레헴의 구유에서부터 골고타의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당신 아드님께 마음의 시선을 고정하고 계신 동정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바람대로 우리가 그분을 만나 그분을 알게 되도록 도와주시길 빕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예수님으로부터 조명된 삶을 살며, 세상 속으로 정의와 평화의 열매를 가져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 이 콘텐츠는 《오늘처럼 하느님이 필요한 날은 없었다》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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