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문’의 의미

영성과 신심

‘좁은 문’의 의미

예수님이라는 문을 통과하기를 바랄 때 읽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

2024. 11. 27
읽음 51

0

0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당신 곁으로 초대하신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하느님 아버지께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예수님이라는 길을 따라 걷는 일이 어렵다고 느끼곤 한다. 예수님께 닿는 길과 그분께 향하는 문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를 함께 읽어 보자.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도중 맞닥뜨리게 된 다음의 질문에 대하여 전합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이 질문에 대해 직접적으로 답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다른 차원의 대화로 이끌어 가셨죠. 암시적인 말씀과 함께 어쩌면 처음에는 제자들도 알아듣지 못할 법하게 말씀을 이어 가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이 대목에서 그분은 ‘문’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구원받는 것이 결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듣는 이들이 깨닫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몇 명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이가 구원을 얻는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그리고 그 답은 바로 ‘문’에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을 향한 여정은 ‘문’을 통과해야만 하는 겁니다. 하지만 그 ‘문’은 대체 어디 있는 걸까요? 그리고 그 ‘문’은 어떻게 통과하는 거죠? 도대체 누가 그 ‘문’인 걸까요? 바로 예수님이 그 ‘문’이십니다! 요한 복음서에서는 그분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죠. “나는 문이다.”(요한 10,9) 실상 그분께서 우리가 사랑과 이해 그리고 보호를 받을 수 있는 천상 아버지께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습니다. “왜 저 ‘문’은 좁은 거죠? 왜 좁다고 말씀하시는 거죠?” 하지만 ‘이 문이 좁다.’라고 하신 건 분명히 우리의 기를 꺾으려고 하신 건 아닙니다. 아니죠! 다만, 우리의 오만과 온갖 걱정을 작게 만들기 위함이죠. 곧, 우리는 죄인이며 우리에게 그분의 용서가 필요함을 깨달아, 그분께 겸손하고 신뢰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문이 ‘좁다’라고 하신 겁니다. 우리의 자존심과 오만이 우리를 비대하게 만드니까요.

 

하느님 자비의 문은 분명 좁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모든 이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하느님은 편애하지 않으시니까요. 그분은 언제나 모든 이를 차별 없이 받아 주십니다. 따라서 좁은 문은 우리의 자존심과 오만, 걱정들을 줄이기 위한 문이며, 그 문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차별 없이 맞아 주시는 활짝 열린 문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당신께 다가오라는 초대를 하십니다. 충만한 생명과 화해, 행복의 문을 통과하라고 말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안아 주고, 당신의 용서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 어떤 죄를 지었든, 무슨 일을 했든 간에 말입니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에게 참기쁨을 선사하시며, 우리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문에 들어가기만 하면, 다시 말해 복음과 신앙의 문을 통과하기만 하면 우리는 세속적이고 나쁜 습관들 그리고 이기심과 닫힌 마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맞닿을 때, 비로소 진정한 변화가 생기는 거니까요. 그리고 우리의 삶은 성령의 빛으로 비추어질 것입니다. 결코 꺼지지 않을 빛으로 말입니다.

 

침묵 중에 잠깐이라도 우리 안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기에, 우리가 저 문을 통과하는 데 방해를 받는지 살펴보도록 합시다. 나의 자존심과 오만 그리고 죄들 말입니다. 그런 다음 다른 측면, 즉 하느님의 자비로 활짝 열린 저 문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우리를 기다리시는 자비의 문 말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구원받고, 저 구원의 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많은 기회를 마련해 주십니다. 이 문은 우리가 낭비해서는 안 될 기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드렸던 이 질문과 같이 학술적으로 구원에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저 구원의 기회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거죠. 왜냐하면 어느 순간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릴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좋은 분이시고 우리를 정말 사랑하신다면서, 도대체 왜 문을 닫으실 때가 온다는 걸까요? 우리의 삶이 비디오 게임이나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은 많은 주의를 요할 뿐 아니라, 성취해야 할 목적이 있다는 게 중요하죠. 바로 ‘영원한 구원’ 말입니다!

 

이제 천국의 문이신 동정 마리아께, 우리가 신앙의 문을 통과하여 자유로움의 길로 들어가도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를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합시다. 그분은 당신 사랑에 참여하는 모든 이를 구원하시니까요. 네,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미 이 지상에서도 사랑은 많은 이의 행복의 근원이죠. 온화함과 인내 그리고 정의 안에서 저 자신마저 잊고 다른 이들, 특별히 가장 작은 이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이들을 통해서 말입니다.

 


 

​* 이 콘텐츠는 《오늘처럼 하느님이 필요한 날은 없었다》 일부를 발췌하여 작성되었습니다.

 

Profile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 삶의 영감을 주는 다양한 콘텐츠를 만들어 갑니다.

다른 분들이 함께 본 콘텐츠

시리즈12개의 아티클

바티칸에서 온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