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의미

신학 칼럼

신학의 의미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신학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2024.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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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신학이 배운 사람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학적인 용어나 표현은 잘 모를지라도, 누구보다 깊이 있는 통찰력을 지닌,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신앙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고도의 학문적 훈련을 받고 학문적 성취를 이루었지만, 실제 하느님을 대하는 태도는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신학자도 있을 수 있겠지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나름대로 신학을 하며 살아간다고 저는 믿습니다.

 

신학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테오스(θεός, 하느님)와 로고스(λόγος, 말씀)를 합친 테올로지아(Θεολογία, 신학)라는 그리스어의 어원적 의미를 풀어서 설명하며 답을 하곤 합니다. 그렇습니다, 신학은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 혹은 ‘하느님에 대한 학문’을 말합니다. 테올로지아라는 그리스어의 뜻도 그렇고, 신학이라는 단어의 문자적 의미도 같은 뜻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느님과 그분을 통해 계시된 진리에 대한 논리적인 탐구 작업 전반’을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신학의 어원적 의미나 사전적 정의를 아는 것이 근본적으로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게 낯선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사용하며 어원적 의미를 따져 묻지 않더라도, ‘신학’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울림’이 있습니다. 신학이라면 무언가 거룩한 것에 대해서, 신적인 것에 대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논할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하지만 누군가 그 ‘거룩한 것’, ‘신적인 것’, ‘하느님’을 체험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그것들을 설명하려고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신학의 출발점은 ‘하느님을 만나는 것’, ‘거룩함을 체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룩함, 혹은 성스러움의 체험 앞에서 인간은 일상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신비와 경이, 숭고함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 신비와 경이는 인간 내면 속으로 깊숙이 들어와서 존재를 흔들어 놓게 되는데, 이성적 존재인 인간은 이렇게 체험한 ‘존재의 흔들림’에 대해서 논리적 이해와 설명을 요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학의 시작인 것이지요. 이처럼 신학은 아주 근본적으로 하느님과의 만남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모든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은 기본적으로 ‘신학을 할 준비’를 갖춘 사람들입니다. 아니, 신학을 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아주 어렴풋이라도 ‘하느님을 만났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체험이 없는, 신앙이 없는 신학은 위험합니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칼날로 우리의 믿음을 난도질할 우려가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이성이 없는, 신학적 반성이 없는 신앙 역시 위험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체험과 느낌에만 의존하여 맹목적인 믿음으로 흐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성과 신앙은 우리의 삶 안에서 조화를 이루며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신학은 사제나, 수도자, 혹은 특별히 신학을 공부한 소수의 전공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만난 하느님을, 자신이 체험한 그 신비를 자신의 삶 안에서 나름대로 소화하고, 해석하며, 살아가야 할 의무와 권리를 지닙니다. 신학을 소수의 전문 신학자들의 손에 맡겨 둘 때, 신학의 흐름은 우리의 신앙적 삶과 유리될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밤하늘에 무수히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그 아름다움에 감탄할 때, 그 모든 것을 지어내신 하느님의 섭리를 되돌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충분히 신학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나를 향해 미소 짓는 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모상성을 읽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신학을 할 준비가 된 것입니다. 부당하고 괴로운 일을 겪으며, 그 안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의미를 묵상하고 그것을 삶 안으로 내재화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우리는 신학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고 그 울림이 일상 안으로 스며들어 갈 때, 우리는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을 순간순간 느끼게 됩니다. 그 일상 속에 스며든 찰나의 떨림을 느낄 때, 우리의 일상은 신학의 장場이 될 수 있습니다. 동시에 신학은 우리의 일상을 해석하는 도구가 되며, 동시에 삶을 구성하는 일부가 됩니다. 복잡하고 난해한 설명이 아닐지라도, 신학적이고 전문적인 용어를 모를지라도, 우리의 삶 안에서 피어난 진리의 꽃을 아주 평범한 언어로라도 설명해 낼 수 있다면, 우리 모두 충분히 훌륭한 ‘일상의 신학자’라고 불릴 수 있지 않을까요?

 

참 재미있게도, 때로는 사제들도 신학을 어려워합니다. 어떤 사제들은 스스로 신학자가 아니라 평범한 사제일 뿐이라고, 마치 유학을 다녀온 소수의 사람들만이 신학자라고 불리기에 합당한 것처럼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을 전공한 사람만이 신학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제가 자신의 손을 통해서 ‘성체성사라는 놀라운 신비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까’ 경탄하는 그 순간에, 이미 그 사제는 신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의 아픔과 슬픔을 바라보며 함께 울어 줄 때, 하느님께서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느냐고 따져 물을 때, 그 사제는 이미 신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니, 사제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이미 신학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을 체험한 순간부터, 그 놀라운 떨림을 스스로에게든 다른 누군가에게든 이야기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이미 신학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철학적 개념이나 신학적 개념을 배우고, 전문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 학문적 훈련을 거듭하는 노력을 폄훼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노력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며, 그런 노력을 통해 신학은 발전할 수 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만이 신학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언어로, 우리의 신앙 체험을, 우리가 만난 하느님을 이야기할 때, 우리 모두 ‘작은 신학자’가 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밤하늘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는 것,

떠오르는 햇살을 바라보며 따스한 온기를 느끼는 것,

세상의 악과 고통에 분노하고 의문을 품는 것,

타인의 얼굴을 진정으로 바라보는 것,

길가에 핀 들꽃에 담긴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신학을 할 수 있는 근원적인 원동력이 됩니다.

어쩌면 신학을 한다는 것은, 복잡하고 난해한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는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안에 담긴 신비를 더 깊이 바라보고 더 예민하게 경탄할 수 있다는 의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의 삶 안에서 각자의 신학을 펼쳐 가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Profile
대전교구 사제. 독일에서 카리타스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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