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도록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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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년 정해박해 200주년을 기다리며

2025. 0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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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K-Faith와 서울 WYD

 

한국 천주교회가 들썩이고 있습니다. 최근 교회 각종 모임의 대화 주제는 단연 서울 세계청년대회(WYD)’입니다. 교회 내 여러 매체 역시 세계청년대회로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전 세계에서 수십만 명의 청년들이 한국을 방문하고, 레오 14세 교황님도 방한하신다니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일각에서는 한국에서 세계청년대회를 개최하게 된 이유를, 한국 교회에 대한 전 세계 교회의 관심과 기대가 집중된 결과이며, 소위 K-Pop, K-Movie 등으로 국위 선양의 선봉에 선 K-Culture에 대한 기대감이 버무려져 이뤄낸 쾌거라고 설명하곤 합니다. 마치 올림픽이나 월드컵을 유치하던 때의 느낌과 사뭇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 교회가 이 대회를 잘 준비해서 어떤 주교님의 말씀처럼 대한민국에 K-Culture만 있는 것이 아니라 K-Faith도 있음을 잘 알리고, 참된 신앙이 미래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더욱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정해박해의 과정

 

한국 교회가 세계청년대회로 축제 분위기를 자아내는 동안, 광주대교구는 그간 한국 교회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박해를 기념하려 준비 중입니다. 정해박해! 1827년 정해년(丁亥年)에 전라도 곡성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박해입니다. 사실 이 박해는 정해년 2~5월까지 약 넉 달 사이 500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체포될 정도로 큰 규모였는데, 한국 교회 내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정해박해 과정을 살펴보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801년 신유대박해로 서울과 경기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서학 열풍이 한풀 꺾였습니다. 신앙 지도층은 유배를 가거나 처형당했고, 신앙을 지키고자 하였던 이들은 산간벽지로 숨어들어 생활했습니다. 그리하여 곡성에도 교우촌이 생겨나고 신앙의 끈을 이어 갔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생계를 위해서는 수입이 있어야 했기에, 대체로 화전을 만들어 담배, 감자 등을 재배하여 팔거나, 옹기를 만들어 생활의 밑천으로 삼았습니다.

 

곡성 덕실마을*에는 옹기굴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신유박해 때 순교한 복자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의 유가족도 그곳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한덕운의 아들 한백겸은 성격이 거칠고 행실이 좋지 못해 사람들이 자주 뒤에서 수군거리곤 하였답니다. 주사가 심했던 한백겸은 어느 날 주막에서 술을 마시고 주인에게 행패를 부렸고, 그러자 아직 예비 신자였던 주막 주인 내외가 한백겸과 신자 몇몇을 곡성 현감에게 고발하면서 박해가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박해는 무언가 개운치 않습니다.

* 현재 전남 곡성군 오곡면 승법리로 추정됩니다만, 미산리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습니다. 더욱 깊은 논의와 역사적 검증을 통해 장소를 특정해야 하는 문제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이와 관련한 연구사 정리는 방상근, 《일성록》을 통해 본 정해박해, 정해박해 진원지, 광주교회사연구소 2023 심포지엄 자료집, 56-57 참조.)

 

이후 박해는 전라, 충청, 경상도로 확대됩니다. 당시 전라 감사는 이광문(李光文)이었는데, 그는 천주교인들의 처리 문제를 놓고 형조(刑曹)에 문의합니다. 체포된 이들 중 7**은 죄질이 나쁘고 회개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8명은 오랜 감옥살이 끝에 회개하였으니 유배를 보내면 좋겠고, 다른 죄인 141명은 모두 실토하였으니 분별을 바란다는 내용이었습니다.1) 이 제안에 따라 형조는 7명은 사형에 처하고, 다른 죄인들은 죄에 따라 처리하라고 명하였습니다.
** 이경언 바오로(+1827), 김대권 베드로(+1839), 이성지 세례자 요한(+1835), 이태권 베드로(+1839), 이일언 욥(1839), 신태보 베드로(+1839), 정태봉 바오로(+1839).

 

그런데 이상하게도 당시 전라 감사 이광문은 언도받은 형을 바로 집행하지 않고, 신자들을 무한정 옥에 가두어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사형 선고를 받은 채 옥에서 12~13년가량을 생활하다 결국 1839년 기해박해 중에 참수된 이들이 많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옥중에서 병사를 하거나 순교한 분들은 총 16명으로, 순교자보다 배교자의 수가 훨씬 많아, 또 무언가 개운치 않은 느낌을 줍니다.

 


 

3. 개선주의(凱旋主義)와 그 이면(裏面)

 

분명한 박해이고, 그 안에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이 있음에도 일반적인 도식, 박해-순교-천상 영광과 같은 방식로만은 설명할 수 없음이 난처합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 보니, 갑자기 스쳐 지나가는 단어가 있었습니다. 개선주의! 영어로 ‘Triumphalism’으로 표현되는 이 말은 소위 승자의 역사, 성공한 것만을 가치 있게 여기는 경향을 의미합니다.

 

정해박해를 떠올릴 때 무언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쩌면 순교라는 거룩한 선택 역시도 수량화, 정량화시켜 판단하려는, 소위 영적 개선주의가 제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백겸의 술버릇으로 시작된 박해라니! 순교자보다 배교자가 훨씬 많은 부끄러운 박해2)라니!

 

저는 올해 315곡성가톨릭역사관개관을 준비하며 여러 차례 곡성을 방문했습니다. 현장에 답이 있다는 말을 화두 삼아, 곡성 성당 곳곳과 옹기 터 등을 방문했습니다. 우선 한백겸이라는 인물에 집중했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괴팍했을까?

 

그는 어린 나이에 천주교때문에 아버지를 잃고, 곡성이라는 산골로 숨어들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산으로 둘러싸인 그곳에서, 아버지 없는 설움을 가득 안고, 어쩌면 하느님을 원망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가 어쩌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교우촌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순교자인 아버지, 그 무게감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해 봅니다. 그러면서 다시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는 괴팍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마치 독립운동가 아버지를 둔 자녀들처럼 말입니다.

 

또 순교의 월계관을 쓴 순교자들에게는 존경을 표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동시에 같은 교우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이들을 옥에 둔 채, ‘천주를 모르오.’라고 답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을 배교자라는 말로 매도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들이 옥을 빠져나오며 느꼈을 부끄러움, 남겨진 이들에게 미안함, 지금껏 지켜왔던 신앙을 인간적 나약함 때문에 버려야 한다는 설움 등 다양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무척이나 더운 올해 여름 에어컨을 켜놓고 머리가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스스로에게, 1820년대 냉방도 난방도 안 되는 맨땅바닥에서, 방충망도 없는 좁디좁은 공간에서 단 한 달이라도 지낼 수 있을지 질문을 던져 봅니다.

 

2020년 부활을 앞둔 성금요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 홀로 섰습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 2,000년 역사 안에서 교회가 하느님 백성의 모임을 하지 못했을 때, 그래서 답을 찾지 못하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교황님 홀로 추적추적 비 내리는 바티칸 광장에서 십자가를 마주하고 섰습니다. 그 장면을 보고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이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다시 그때의 장면이 떠오릅니다. 팬데믹으로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없는 것처럼 보였을 때, 희망이 없어도 희망을 전하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홀로 십자가 앞에 서신 교황님의 모습. 참으로 나약해 보이는 인간적인 모습이었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솔직한, 그래서 진한 감동을 주는 모습이었습니다. 힘 있고 영광스러운 모습일랑 찾아볼 수 없고, 간신히 안간힘을 쓰며 하느님께 의탁하는 장면! 그 장면은 어느 노래의 제목처럼 슬프도록 아름다운모습으로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1827년 정해년, 곡성에서 발발한 박해 정해박해도 교황님의 이 모습과 많이 닮은 느낌이 듭니다.

 

ps. ‘곡성가톨릭역사관은 곡성 성당 내에 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많은 분이 곡성 성당 순례를 통해 신앙 선조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시면 좋겠습니다.

 


 

각주

1)《벽위편》(闢衛編), 정해삼도치사(丁亥三道治邪); 최선혜, 《한국천주교회사 2, 한국교회사연구소, 2010, 183-184에서 재인용.

2) 샤를르 달레, 《한국천주교회사》(), 안응렬·최석우 역, 분도출판사, 1980, 113 참조. 달레 신부는 당시 조선에서 선교하던 파리외방선교회 신부들의 보고서, 편지 등을 기초로 《한국천주교회사》를 저술하였는데, 이 책에 따르면 정해박해에 대해 모든 박해 중에서 가장 통탄할 만한 박해, 이렇게 배교자가 많았던 때는 일찍이 없었다.”라고 언급하였습니다.

 

Profile
광주대교구 사제. 현재 광주대교구 교회사연구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교회사와 광주대교구, 교구 내 수도회에 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간추린 보편 공의회사》, 《하느님의 인플루언서》를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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