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의 질문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 처음 살게 된 기숙사는 ‘카노니치 레골라리 라테라넨시Canonici Regolari Lateranensi’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수도 공동체였습니다. 10여 명 남짓으로 탄자니아, 필리핀, 한국, 우크라이나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모인 신부들과 신학생들이 함께 사는 공동체로 원래는 신학생 양성을 위한 공동체였습니다. 이 공동체는 아우구스티노 수도 규칙을 따라 사는 수도회였는데,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히포의 주교가 되자 주교좌성당에 모여 사는 사제들에게 규칙을 정해 주고 함께 살기 시작한 게 그 시작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는 예의상 친절을 보이지만, 동시에 친해지고 싶은 마음과 호기심도 생깁니다. 그래서 아직 이탈리아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질문을 생각하는 것마저도 큰일이었던 저는 일방적으로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서품은 언제 받았는지, 이탈리아어는 공부를 하고 왔는지, 무엇을 공부하러 왔는지, 한국은 신학교 시스템이 어떻게 되는지 등등. 그러다 갑자기 마우리찌오(Maurizio)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신학생이 한참을 생각하더니 질문을 던졌습니다. 29세에 신부가 되었다는데, 계산을 해 보니 안 맞는다고. 신학교 생활은 6년제라고 했는데, 왜 26세가 아니라 29세에 신부가 되었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2. 군대
저는 웃으며, 그러나 문장을 만들려고 애쓰며 대답했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있다. 현재 정전(停戰) 상태이다 보니 한국의 남성은 의무적으로 2년 2개월 군 생활을 해야 한다. 나도 26개월을 복무했다. 그러다 보니 신부가 되기 위해 3년의 공백이 필요하다.”
저의 이러한 대답에 질문을 던지던 그 친구의 표정이 자못 심각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제 지망생, 신학생도 군대를 가야 해? 군종병이 아니라, 진짜 군인으로?”
저는 다시 웃으며, 일반 병사로 26개월을 근무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친구는 대답을 듣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제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군대는 어떤 곳이야? 사람을 죽이는 훈련을 하는 곳이지! 그런데 사제가 된다고 하는 신학생이 군대를 가?”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대한민국 남성에게 군 생활은 당연한 것, 의무, 신성한 것이라고 교육을 받아 왔고, 단 한 번도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저의 이러한 생각이 어쩌면 ‘문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울러 초대 교회의 배경이 된 로마 제국 시대에도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당시에는 높은 신분에 속하는 군인 신분을 버렸다는 이야기도 떠올랐습니다. 또 당시에는 속으로 비웃었던 타 종교의 “양심적 병역 거부” 사례도 떠올랐습니다. 무엇이 올바른 가치관일까? 신앙인으로서, 사제직을 지향하며 살아온 신학생으로서…….
3. 선택
한참을 잊고 살았던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다 10여 년 전 이 이야기가 문득 다시 떠올랐습니다. 저는 친척들이 많은데, 저보다 10살가량 어린 조카 녀석이 이민을 가겠다고 했습니다. 왜냐고 물으니 이런 나라에서 못 살겠다며 자식들에게는 조금 더 여유로운 교육과 경험을 시켜 주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는 대통령 탄핵이 결정될 무렵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웠던 때였습니다. 처음엔 단순한 이민이라고 생각했기에, 본인 그리고 자녀들을 위해 새로운 선택을 한 조카의 결단을 존중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꼬리를 물다가 결국 “국가도 개인이 선택할 수 있구나!”라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1970년대에 태어나 국민 교육 헌장을 외고, 매일 애국 조회, 반성 조회 등에 익숙하며,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라는 가사를 멜로디에 맞춰 줄줄 외던 저에게, 대한민국에 태어났으니 대한 국민으로 살아가는 것이 당연했던 저에게, 한 인간이 국가도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사실은 순간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왕정 국가가 아닌 공화국에서 태어났음에도,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서거 시 수많은 어머니들이 소복을 입고 동네에 마련된 분향소에서 모두 곡을 하며 울던 모습을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저 자신이 시대착오적인 모순덩어리처럼 느껴지곤 했습니다.
4. 국가 그리고 개인
최근 우리나라는 또다시 격랑의 시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정치색을 떠나 계엄과 탄핵의 과정을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비상계엄’이라는 시대착오적 선택을 했다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책임을 지는 게 상식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왕정 시대를 살아가는 듯한 사람들을 봅니다. 시대가 변해 민주 공화국에 살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지난 7월 28일부터 광주대교구 교구 박물관에서는 “한국 독립운동과 천주교”라는 주제로 광복 80주년 기념 특별 전시를 하고 있습니다. 큰 주제로 ‘신앙인 안중근 토마스와 그의 가족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해 ‘독립운동에 참여한 천주교인들’의 이야기로 독립기념관과 함께 공동 기획으로 전시를 펼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안중근 의사는 1879년에 태어나 1910년 순국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 역시 비슷한 시대를 살아 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았던 시대는 조선 왕정,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 3·1 만세 운동, 독립(광복)의 시대였습니다. 그들은 조선 왕정에서 태어나 유교가 국시(國是)인 나라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정에 속하면서도 왕의 신민(臣民)으로만 살지 않았습니다. 대한 제국에 살면서도 황제의 신민으로만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일왕(日王)이 다스리던 일제 강점기 중에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즉 백성이 주인인 나라를 외쳤습니다.
왕, 황제, 국가가 법의 테두리 안에 묶인 하나의 틀이라면, 백성, 개인은 하나의 주체성을 가진 개체이자 독립된 존재입니다. 법의 테두리라는 표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규범 질서를 의미하고, 독립된 존재라는 표현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신법이자 자연법의 영역에 속한 인간의 본질을 가리킵니다. 신앙인 안중근은 독립운동을 펼치며 의거를 행했고, 동시에 ‘동양평화론’을 주장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것은 단지 나라를 빼앗긴 울분의 결과가 아닙니다. 그의 의거는 자연법적 정의 위에서 천부적 인권, 즉 더 낫고 살만한 인간 세상을 추구한 결과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5. 순교자(殉敎者), 선구자(先驅者)
저는 교회사를 전공한 탓에 10여 년 동안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교회사의 가장 첫 부분에는 박해 그리고 수많은 순교자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순교자! 사전적 의미로는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가 믿는 신앙이 얼마나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쳤기에 목숨까지 바쳤을까 생각해 봅니다.
조선 시대 신앙 선조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소위 “양박청래(洋舶請來)” 운동을 벌이기도 합니다. “양박청래”란 서양의 큰 배들을 조선의 해안가에 불러 조선의 왕으로 하여금 겁을 먹게 하여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게 하자는 분명, 일종의 반민족적 운동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황사영 알렉시오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지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왕정 시대를 살면서도 왕의 신민이 아닌 개인의 가치, 신앙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던 이들이 그런 의미에서 순교자는 아닐까요? 즉, 왕정 시대를 살면서도 공화제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던 이들이 순교자가 아닐까요? 500년의 조선 왕조의 법, 즉 시대와 장소에 제한된 법을 추구하며 살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초월해 하느님의 법(신법, 자연법)을 살아 낸 선구자들이 순교자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이하여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 하느님의 법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며 살았던, 그래서 순간(瞬間)이 아닌 영원(永遠)을 살았던 순교자들의 기개와 마음을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그렇기에 다소 무모하고 거칠게 보일 수도 있는 단상(斷想)을 함께 나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