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님의 아름다운 봉헌

가톨릭 예술

성모님의 아름다운 봉헌

사소페라토의 <기도하는 성모>

2025. 0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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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오래된 친구 한 명이 있다. 첫 본당 보좌 신부일 때 막내 수녀님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동갑이었다. 사실 우리가 처음부터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사제로, 수녀님은 수도자로 둘 다 막 첫걸음을 뗀 초보자였고 성격이나 활동 방식에서도 많은 차이가 있었기에 갈등도 많았다. 하지만 점차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수녀님의 배려 깊은 마음과 호탕한 성격 덕분에 친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지금, 나에게 유일한 친구 수녀님이 되었다. 15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외국에서나 국내에서도 가끔씩 연락하고 지낸다. 내가 그리 살가운 편이 아니어서 전화를 자주 한다거나 필요한 것을 보내드리는 것도 잘 못한다. 그저 몇 달에 한 번, 혹은 일 년에 한 번 수녀님과 통화를 하면 그것이 전부다. 그저 잘 지내시겠거니 생각하며 일상 속 바쁜 일에 묻혀 지내다가 잊을 때쯤 수녀님이 톡을 주신다. “신부님, 혹시 통화 가능하세요?” 그때서야 수녀님과 전화 통화가 성사되는 사이다. 이런 사이가 어떻게 친구일 수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가끔이나마 연락됐을 때, 너무 반갑고 동시에 바로 어제 만난 친구처럼 전혀 어색함이 없다. 그저 친한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한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오늘 소개할 성화를 일찌감치 선택했지만 몇 주간 그저 바라볼 뿐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큰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마침 어제 못했던 통화가 생각났다. 친구 수녀님이 톡을 보냈는데, 잊고 있었다. 수녀님과 통화를 기다리는 40여 분의 시간 동안 내 앞 모니터에 띄워 놓은 성화가 갑자기 온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성화를 바라보며, 그동안 수녀님께 해 드린 것이 참 없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나를 마구 짓눌렀다. 그저 수녀님을 위해 기도하고 미사 때 기억하는 것이 전부였을 뿐……. 수녀님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셨지만, 언제나 먼저 연락해 주시고 내 고민거리를 들어주는 참 고마운 친구다.

 

스스로를 봉헌하며 평생 수도자처럼 사신 성모님

2월 첫 주는 주님 봉헌 축일로 성모님께서 성전에 아기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동시에 이날은 축성 생활의 날로 수도 성소를 위하여 특별히 기도하고, 축성 생활을 올바로 이해하도록 권고하기 위해 교회에서 정한 날이다. 그래서일까? 친구 수녀님과 통화를 앞두고 주님뿐 아니라 당신 자신을 봉헌하고 평생을 수도자처럼 사신 성모님의 모습이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 같다.

이 성화의 작가는 조반니 바티스타 살비 다 사소페라토(Giovanni Battista Salvi da Sassoferrato)’로 출생지였던 사소페라토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아버지에게 그림을 배우기 시작해 나폴리에서는 도메니키노 밑에서 공부했고 나중에 카라치의 제자가 되었다. 신앙심이 깊어 젊었을 때부터 수도원을 위해 제단화를 그렸던 그는 특히 성모화를 잘 그려 인기가 많았다. 그의 작품들은 라파엘로나 그의 제자가 그린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라파엘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기도하는 성모(The Virgin in Prayer)

조반니 바티스타 살비 다 사소페라토(1609~1685), 1640~1650, 내셔널 갤러리, 런던, 영국

 

사소페라토와 가톨릭 종교 개혁 운동

오늘 성화의 제목은 <기도하는 성모>로 우리가 친숙하게 느끼는 성모님의 모습을 담고 있다. 성모님은 깊은 어둠 속에서 두 손을 곱게 모으고 정성스럽게 기도하고 계신다. 그분의 모습은 그 어느 여인보다 티 없이 아름답고, 온화하며 깊은 눈빛, 자연스럽지만 정성스럽게 모은 손, 우아한 의상 등으로 인간의 모습이 아닌 천상 어머니의 자태를 지니신 분으로 묘사되었다.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가 상상하던 천상의 어머니 모습 그 자체다.

이전에는 성모님을 신성한 세계 속에 자리한 우아한 여인의 모습으로 표현하여 그분 자체를 거룩하게 표현했기 때문에 인물 표현에 감정이 세세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반면 사소페라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까만 바탕에 성모님의 표정과 자세, 손가락 하나하나, 심지어 색상에도 감정을 듬뿍 담아 넣었다. 이렇게 성모님을 표현한 이유는 성모 신심을 북돋기 위해서였다. 신심이 깊고 베네딕토회나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던 그는 카를로 돌치(Carlo Dolci, 1616~1686)와 함께 17세기의 가톨릭 종교 개혁 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여 성모님에 대한 신심을 다시금 불러일으키기 위해 노력했다.

 

가톨릭 종교 개혁 운동은 루터로부터 촉발된 종교 개혁에 대항하여 교황청을 중심으로 가톨릭교회에서 벌였던 개혁 운동이다. 프로테스탄트의 경우, 더 이상 신이나 성인을 시각적으로 묘사하는 것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모든 것의 중심에 성경을 두어 성모님이나 성인에 대한 공경을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결국 성미술이나 성상 등을 금지·폐기하기까지 이르렀다. 그 결과 프로테스탄트가 장악했던 북유럽의 신교 화가들은 이제 교회와 신앙보다는 주변의 일상적인 이야기, 초상화나 풍경화 등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반면 가톨릭 교회의 경우, 트리엔트 공의회나 바로크 양식의 미술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성미술 작품들을 통해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도록 노력했다. 바로크 양식은 선명한 색채, 역동적인 구성, 강렬한 감정 표현 등을 특징으로 하기 때문에 신자들의 감정, 즉 신앙심을 고취하는데 굉장히 유용했고 이를 통해 북유럽 회화와 차별점을 두었다.

 

천상의 모후, 거룩하신 성모님을 드러낸 작품

사소페라토도 성화를 그리면서 마치 한 편의 연극처럼 암흑 속에서 밝게 조명을 받은 성모님을 표현했다. 그는 주인공인 성모님이 의상에서부터 손끝에서 전해지는 떨림까지 세세하게 그 감정이 우리에게 전달되도록 노력했다. 이제 남은 것은 성모님이 전해 주시는 것을 우리가 받으면 된다.

깊고 짙은 검은색 에나멜 느낌의 매끄러운 질감 바탕 속 가장 빛나는 부분은 한 곳이 아니다. 조명을 받은 듯 머리 위 빛나는 하얀 두건과 그를 통해 그늘진 성모님의 수줍게 내린 얼굴 아랫부분, 그리고 고요히 모은 두 손과 함께 천상을 의미하는 파란색 외투이다. 수도자처럼 머리와 상부 전체를 하얀 두건으로 감싸고 고통과 열정을 상징하는 붉은색 드레스가 살짝 보이지만 눈에 띄는 것은 성모님 전체를 둘러싼 울트라 마린이라는 파란색 겉옷이다. 당시 울트라 마린은 금보다 비싼 안료였지만, 그만큼 성모님의 거룩하심과 귀하신 천상의 모후로써의 가치를 드러낸다. 고귀하신 어머니께서는 하얀 두건 아래로 아름답고 경건하게 얼굴을 내미시며 신앙의 열망을 붉은 얼굴빛과 드레스로 보여 주신다. 곱게 모은 두 손은 소녀의 소박한 소망을 담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실물 크기의 작품은 성모님과 얼굴을 마주하며 그분의 손을 맞잡고 고개 숙여 함께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성모님께서는 지금 막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신 후, 기도하고 계신 모습과 함께 당신 자신도 함께 봉헌하고 계심이 느껴진다. 그래서 더욱 성모님의 모습이 마치 수도자의 기도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그분이 성전에 봉헌하신 의미는 무엇이고 어떻게 생각하시며 기도하시는 것일까? 봉헌은 그저 내 것을 바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일까? 우리에게 봉헌은 어떤 의미일까?

 

친구 수녀님이 했던 이 말이 마음을 울린다.

 

봉헌은 내가 단순히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것, 내가 받은 것이 너무 많아서 그저 내어 드리고 싶은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이 들어요.”

 

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교회문화유산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이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예술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회 문화유산의 보전과 교회 예술의 진흥을 위해 힘쓰며,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교회 예술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주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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