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시작하며, 성모님과 함께

가톨릭 예술

새해를 시작하며, 성모님과 함께

보티첼리의 〈마니피캇의 성모님〉

2024. 12.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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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며 신자분들과 어떤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 좋을까 고민이 많았다. 며칠을 고민하다 언제나처럼 성무일도를 바치는데, 한 기도문이 눈에 들어왔다. 한 해를 시작하며 바치는 첫 기도가 ‘11일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의 성무일도 안에 있는 성모의 노래였다.

(옛 기도서라 기도문이 예전 성경의 표현이지만, 문장을 옮겨 본다.)

 

내 영혼이 주를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로다. 능하신 분이 큰 일을 내게 하셨음이요,

그 이름은 거룩하신 분이시로다.

그 인자하심은 세세 대대로 당신을 두리는 이들에게 미치시리라.”(루카 1,46-55)

 

이 기도문을 읆으며 한 작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니피캇의 성모님 Madonna del Magnificat>으로 이탈리아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갔을 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산드로 보티첼리 작품이다. ‘마니피캇Magnificat’성모의 노래를 의미한다. 이 작품은 스승이었던 필리포 리피Filippo Lippi에게 배운 고급스럽고 밝은 색상, 날카롭고 명확한 윤곽선, 선형적인 우아함, 흠잡을 데 없는 디자인이 눈에 띄었다. 그뿐 아니라 금빛 향연 속 성모님의 우아한 아름다움은 한동안 나를 그림 앞에 머물게 했다.

 

마니피캇의 성모님(Madonna del Magnificat)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1445~1510), 1481, 나무 위 템페라, 118*119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이탈리아

 

마니피캇, 성모의 노래

이 둥근 모양의 성화에는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앉히고 글을 쓰시는 성모님과 천사들이 등장한다. 이 그림이 <마니피캇의 성모>라는 제목을 가진 이유는 아기 예수의 손이 가리키는 페이지에 명확하게 나타나는 단어 때문이다. 바로 성모의 노래의 첫 번째 구절인 “Magnificat anima mea Dominum(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합니다).”이다. 반면 성모님의 손에 가려진 왼쪽 페이지에서는 “Benedictus(즈카르야의 노래; 루카 1,68-79)”의 일부 구절을 볼 수 있다. 이 구절은 바로 즈카르야가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의 노래이다. 성모님은 오른손에 펜촉을 들고 계시고, 아기 예수도 성모님의 팔에 섬세하게 손을 얹어 마치 글을 쓰도록 안내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예수님이 왼손에 쥔 석류를 성모님도 함께 쥐고 계심으로써 하느님과 그가 택하신 자 사이의 완전한 일치를 확인할 수 있다. 참고로 석류는 왕족과 다산의 상징인 동시에 예로부터 심장의 모양과 닮았다 하여 생명을 나타내고, 그 붉은 씨앗은 예수님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흘린 피를 상징하기도 한다성모님과 예수님이 마주 보는 시선은 마치 아기와 어머니가 서로를 신뢰할 때 전해지는 따뜻함을 담고 있어 두 분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다.

 

보티첼리의 성모님과 아기 예수

<마니피캇의 성모>는 직경 118cm의 둥근 패널위에 그려진 템페라 그림이다. 일반적으로 이런 둥근 모양의 성화는 기관이나 세속적 후원자가 개인적으로 의뢰하는 것이 경우가 많았고, 주로 회의실이나 접견실과 같은 장소에 걸어 두거나 미켈란젤로의 <톤도 도니 Tondo Doni>와 같이 결혼 축하와 가정 축복을 기원하며 제작되기도 했다. 따라서 많은 역사학자들은 이 그림이 당시 피렌체의 권력자 집안이었던 코시모Cosimo의 아들이자 로렌초Lorenzo the Magnificent의 아버지인 피에로 데 메디치 Piero de 'Medici의 가족을 성모자의 역할로 묘사했다고 추측한다.

 이 그림에서 가장 먼저 눈을 사로잡는 것은 천사들 사이에 아기 예수를 무릎에 앉히신 성모님이다. 자연주의와 이상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보티첼리는 성모님을 매우 아름답고 고귀한 젊은 여성으로 표현하였다. 성모님은 살짝 왼쪽에 앉아 몸을 틀어 무릎에 앉으신 예수님이 중앙으로 오도록 한다. 맨몸에 하얀 보를 살짝 걸치신 예수님과 달리 성모님은 빨간 드레스 위로 정교하게 장식된 짙은 파란색 망토를 덮고 있다. 옷은 굉장히 세밀하고 세련되게 표현되었으며, 목에는 화려한 스카프를 두르고 있다. 밝은 금색의 성모님 머리는 화려하게 장식된 검은 마포리온(겉옷)과 스카프 위 투명한 베일로 덮여 있다. 성모님과 천사의 머리 스타일과 의상은 15세기 후반의 부유한 피렌체 가문의 자손이 입던 패션을 반영하고 있다. 이 성화는 비슷한 시기(1480~1481)에 동일한 주제로 그린 밀라노 폴디 페촐리 미술관에 있는 작품과 비교해서 살펴보면 많은 차이점을 찾아볼 수 있다.

 

천상의 아름다움을 그린 작품

이 작품에서는 두 천사가 동정녀의 머리에 마치 무수히 많은 별을 새겨 놓은 듯 정교하고 세밀한 금빛 왕관을 씌우고 있다. 별은 처녀자리의 특성을 담고 있어 성모님이 동정녀이심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여왕이심을 알려 준다. 둥근 태양으로 표현된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여러 줄기의 금빛 광선은 바로 은총의 빛으로 그 모든 것을 선물하신다. 왕관에서는 마치 성모의 노래가 음악으로 흘러나오는 듯, 황금빛 줄무늬가 수놓아진 얇고 투명한 띠들이 휘날린다.

 이 그림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재미있는 장치들이 숨겨져 있다. 먼저 성화의 이 장면이 저 뒤 밝고 평화로운 시골 풍경이 보이는 창문 앞에서 발생한 사건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 천상에서 벌어지는 사건으로, 화가는 세상과 구분된 장면임을 보여 줄 장치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 성화는 마치 이미지가 볼록한 거울에 비친 것처럼 원형 움직임을 따라 앞쪽 인물이 그림의 표면보다 앞으로 나와 보이게 하여, 성모님과 예수님을 부각시키고 그분들이 들고 계신 손과 책을 강조했다.

이러한 효과를 주는 것은 바로 그림 위쪽을 동굴처럼 둥그렇게 아치형으로 채운 채색된 석재 프레임이다. 물론 돌로 만들어진 천정이지만, 짙은 파란색으로 두껍게 칠하고 원형 위쪽을 둥그렇게 채우는 동시에 그 안에 태양이신 하느님과 광채를 넣어 천상을 연상하게 하고, 밖의 세상과 구분되도록 하는 효과를 주었다. 그리고 성모님을 정중앙이 아닌 오른쪽 3/4 위치에 고개를 숙인 모습으로 배치하고, 왼쪽 천사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게 함으로써 긴 마름모 형태의 뒷배경이 원근법 규칙에 따라 보이게 되어 볼록한 느낌이 난다. 물론 계층을 나누어 성모님과 예수님을 천사들보다 크게 그리기도 했다. 화가는 둥근 모양의 패널을 조화롭게 구성하기 위해 성모님의 등과 몸을 부드러운 곡선으로 묘사하였다. 이는 성모님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예수님을 보호하고 그분과 함께하는 것으로 보이는 효과를 준다. 동시에 성모님의 머리에서 손끝까지 이어지는 우아하고 부드러운 곡선은 책 위, 어머니와 아들의 손이 만나는 곳으로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것이 이 작품의 가장 중심적이고 정신적인 포인트이다.

 매일 바치는 기도 속에서 새해를 시작하며 성모의 기도를 통해 이처럼 매혹적이고 금빛으로 은총 가득한 이 성화를 떠오르게 해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하루하루마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있었음을 이 성화를 통해 다시 한번 깨우치며, 주님께 모든 것을 감사드린다.

 

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교황청립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교회문화유산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이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문화예술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교회 문화유산의 보전과 교회 예술의 진흥을 위해 힘쓰며,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한 교회 예술의 중요성을 알리는 데 주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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