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자들을 위한 교의 신학 길잡이> 시리즈의 아티클로, 이 글은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신화(神化)되기 위함이다.”에서 이어집니다❗
‘삼위일체’ 성령
초세기 교회가 삼위일체 교의를 정립하는 과정에서 직면한 가장 큰 쟁점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어떻게 확립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리스도가 진정한 하느님이신지, 진정한 인간이신지가 계속 논란의 중심이 되었고, 이에 대해 교회는 성부와 성자는 ‘동일 본질’이라는 신앙 정식으로 이를 명확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의 다른 위격이신 성령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한계였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카이사리아의 주교 바실리우스(Basilius of Caesarea, 329 또는 330-379)는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는 신앙 정식이 단지 “성자께서 성부와 동일한 본질을 지닌 참하느님이시다”는 점을 명시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며, 성령의 신성 또한 분명히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또한, 성자가 독생자로서 성부에게서 나셨다는 선언, 즉 ‘성부와 같은 본질’이라는 고백은 성령도 같은 신성을 가졌다고 말하기 위한 전제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대한 계시는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없이는 이해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실리우스가 성령의 신성을 강조한 또 다른 이유는, 성령의 역할이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성령을 통해 가능한 것이며, 우리가 참되게 기도하고 찬미할 수 있는 것도 성령 안에서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또한 바실리우스는 성부와 성자의 사랑을 완성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며, 그 성령께서는 피조물 안에 반사된 삼위일체 하느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신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바실리우스는 영적이며 금욕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승리가 지닌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자리라고 보았습니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381년)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성령의 신성을 정식화하고 공적으로 인정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빛’ 성령
성령의 신성을 확인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성령을 피조물로 여기며, 성부와 성자보다 열등하다고 주장하는 ‘성령적대론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입장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습니다.
첫 번째 부류는, “성령은 하느님이시다”는 말이 성경에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성령께 찬미를 드리거나 영광을 돌려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정통 교부들은 성경 해석의 원칙을 정립하고, 계시의 점진적 전개라는 관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하였습니다. 특히 나지안주스의 주교 그레고리우스(Gregorius of Nazianzus, 329 또는 330-390)는 다음과 같은 신학적 통찰로 이를 설명하였습니다.
“구약은 성부를 분명히 드러내고, 성자는 더 희미하게 예고하였다. 신약은 성자의 존재를 명확히 선언하였지만, 성령의 신성은 희미하게 암시되었을 뿐이다. 이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며, 자신을 보다 명확히 드러내고 계신다.”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는 이단자들의 두 번째 논거는 성령의 기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만일 성령이 성자와 같이 “낳아지신 분”이라면, 성령은 성자와 같은 위치가 되어 둘을 형제처럼 여기는 오류에 빠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반면 성령이 성자에게서 유래한다고 말하면, 이는 결과적으로 성령을 성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처럼 성령의 기원을 잘못 이해한 이들에게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나란히 헤아릴 수 없는, 그 아래에 덧붙여진 존재로 간주되었고, 마침내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주장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피조물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과 피조물은 존재의 방식과 본질에서 완전히 다릅니다. 피조물은 외적 조건에 구속되지만, 성령은 자유로우며 해방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피조물은 생명을 필요로 하지만, 성령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세례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십니다. 세례의 표징이 지닌 가장 깊은 의미는 하느님의 생명 자체를 우리에게 나누어 주는 것입니다. 이 나눔은 곧 하느님에 대한 살아 있는 인식이며, 빛의 체험으로 표현됩니다. 그렇기에 세례를 받은 이들이 “빛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이 빛은 바로 그리스도에게서 오시는 성령입니다.
‘신적 생명의 보증’ 성령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시라면, 우리는 세례를 통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며, 그로써 ‘신적인 존재’, 곧 양자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영광스럽게 찬미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바실리우스는 세례의 행위를 예로 들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이 삼위는 위계적이지 않으며, 동일하게 활동하시는 분들이라고 주장합니다(마태 28,19 참조). 바실리우스에게 세례에 대한 언급은 교의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는 세례 체험을 통해 “세례를 받은 후의 삶은 결코 이전과 같을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지만, 죄로 인해 그 모상이 훼손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모상은 회복됩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이 지속적으로 회심하며 살아가도록 도우시는 분입니다. 성령은 죄로 인해 덧씌워진 악함에서 우리를 정화하시며, 본래의 아름다움으로, 순수한 하느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십니다. 곧, 성령이 인간의 영혼을 다스리고, 그로 인해 ‘영적으로 변화된 영혼’이 육체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례 이후, 거룩함을 향한 여정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됩니다. 즉, 세례를 통해 피조물의 ‘신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빛으로 이끄는 움직임
피조물은 세례를 통해 참으로 삼위일체 하느님과 만나는 체험을 하며, 세 위격의 친교 안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께서는 세례 안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동안, 신적 생명의 ‘보증’으로 주어지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거처가 된 우리는, 성령을 지닌 자로서 ‘영적인 사람’이 되고, 성령의 열매를 다른 이들에게도 드러내고 나누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례는 우리를 ‘완전한 성령의 운반자’로 변화시키며, 온 피조물을 ‘신화’시키고, 완전한 빛의 조명을 가져옵니다.
이러한 거룩한 신화는 창조 때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것이며, 이는 곧 “하느님과 유사한 본질에 가까운 존재”로 인간이 창조되었음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세례를 통해 변화된 사람의 모습은, 창조된 인간 본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주는 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의 본래 아름다움이 회복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너희 안에 머무르고, 너희는 내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4)라는 약속이 실현되며, 하느님과의 닮음이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을 세례 안에서 이끄시는 분은 성령이시며, 이는 곧 성령께서 참 하느님이심을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생명을 주시고, 거룩하게 하며, 인간을 신적으로 변화시키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활동은 단지 말씀의 구원 경륜에 봉사하는 도구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령의 인도 아래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으로 축소되지 않고, ‘그리스도 안의 삶’, 곧 ‘신화되는 삶’으로 고양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손으로 빚으신 작품 안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며, 그 작품들이 당신의 아들과 닮고 그분과 일치할 때, 그 영광은 완성될 것입니다. 곧, 성부의 손길, 다시 말해 성자와 성령의 활동을 통해,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과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