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신도를 위한 교의 신학 가이드> 시리즈의 아티클로, 이 글은 ‘교의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에서 이어집니다. 💚
하나의 신앙 고백을 위한 어려움들
신앙 고백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특히 그리스도교로의 대규모 개종이 이루어진 이후에는 매우 수준 높은 신학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어느 지역에서 소집된 시노드에서 하나의 교의가 채택되면, 반대 입장을 지지한 주교들은 이단으로 정죄되고 파문되었습니다. 하지만 일반 신자들은 교의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이단의 문제를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따르던 주교가 파문당했을 때에야 비로소 혼란을 겪곤 했습니다.
사실 주교의 가르침이 한 지역 교회 안에서 일관되게 전해진다면 혼란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 수없이 갈라져 나간 개신교 교회들처럼 각 교파가 자신들의 교리를 ‘진리’로 규정할 경우, 겉보기에는 신앙의 충돌 없이 존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는 지역 교회 각각의 자율적인 교의 선언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초대 교회 안에는 이미 일찍부터, 모든 교회가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고, 그 보편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려는, 이른바 ‘에큐메니컬’(ecumenical)이라는 개념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제국 내 분열을 봉합하고 통일을 이루기 위해 이러한 논쟁들에 개입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인정하는 일치된 교의는 원활한 통치를 위해 이룩한 황제의 업적에 불과한 것인가?”
아닙니다. 교회 교부들은 교의의 인준을 황제의 소집 결과가 아닌 그 공의회의 결정에 전체 교회가 동의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동의는 모든 주요 지역 교회의 주교들, 그리고 반드시 로마 교회의 대표가 참여하고 서명함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선포된 교의는 단순한 정치적 타협의 결과가 아닌 전체 교회의 보편적 신앙을 확인하고 공인한 중요한 표지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아리우스 등장과 함께 찾아온 새로운 혼란
교부들의 힘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4세기 교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아리우스(Arius, 256–336)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교회의 공적인 신앙에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왜 아리우스주의는 교회에 그렇게 큰 위기를 가져왔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 로마 제국에서 받아들여지던 정치 철학이 공적 신앙보다 아리우스주의와 더 잘 부합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정통 신앙은 누가 세상의 참된 왕인지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반면 아리우스주의는 제국의 통치 원리를 아주 교묘하게 활용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제국은 영원한 하느님 아버지가 다스리는 나라를 반영해야 하며, 따라서 지상의 제국 또한 오직 한 사람의 황제가 통치해야 한다. 그런데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아들(그리스도)’도 참 하느님으로 인정한다면, 이는 지상의 군주제, 곧 단일 통치 체제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리우스주의는 하느님이 오직 성부뿐이며 성자는 창조된 존재로서 ‘신적 지위’를 부여받았을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이해는 황제 역시 ‘창조된 신성’을 가질 수 있다는 신학적 가능성을 열어 주었고, 결과적으로 인간 황제의 신격화에도 정당성을 부여했습니다. 겉보기에는 단순하고 이해하기 쉬운 구조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은 새로운 민족들에게는 매우 취약한 교리였습니다.
아리우스는 유대교의 성경적 전통과 헬레니즘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는 성경을 근거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성자의 ‘신성’ 자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들이 되는 방식과 그 시점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아리우스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던 것이 아니라, 시간 안에서 ‘아들이 되어 간’ 존재입니다. 성자는 창조되었으며, 영원하지 않고, 성부에 대해 종속된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성부로부터 성자를 그렇게 강하게 구별한 후, 어떻게 성자와 성부 사이의 ‘일치’를 주장할 수 있었을까요?
아리우스의 반대자들, 곧 정통 교회의 교부들은 일치의 근거를 ‘본성’ 안에서 찾았습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어 신학 용어인 ‘우시아’(ousia, 본성)가 사용되었습니다. 성부와 성자는 모두 참 하느님이시며, 그 본성이 같기 때문에, 이 일치는 곧 ‘동일본질’(homo-ousios)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두 줄기의 빛
순교 시대가 끝나고 그리스도교 신앙이 공인된 이후, 종교적 갈등은 외적 충돌에서 인간 내면의 전투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내면 깊숙이 남아 있는 이교적 신앙과 맞서 싸워야 하는 수고가 남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외적 박해가 사라졌더라도, 영적인 생활 없이는 식별하기 어려운 유혹과의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외부의 이단과 내적인 투쟁이 동시에 존재하던 초대 교부 시대에, 우리는 두 명의 위대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①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
첫 번째 인물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아타나시우스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 이단과 치열한 신학 논쟁을 벌였으며,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신앙 정식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황제들에 의해 다섯 차례나 유배되었지만, 올바른 신앙을 위해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러한 확고한 신념은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우스와의 만남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 만남을 계기로 《안토니우스의 생애》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②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우스(Antonius, 251–356)
두 번째 인물은 이 책의 주인공인 사막의 수도자 안토니우스입니다. 그는 초대 교회 역사에서 수도 생활과 은수자 전통의 시초로 인정받는 인물입니다.
아리우스는 예수 그리스도를 성부 하느님보다 낮은 존재, 곧 ‘반신’(半神, semi-dio)으로 격하시켰습니다. 이에 맞서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생애를 통해 논박합니다. 안토니우스는 세상을 떠나 사막과 무덤가의 고독한 삶 속으로 들어갔고, 금욕 생활을 통해 인간의 욕망과 육체적 쾌락을 이겨 내고자 하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의 수도자적 고행이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선포하는 삶의 증거이며 인간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신화(神化, divinizzazione)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라 증언합니다. 더 나아가 아리우스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가 본성상 참 하느님이 아니고 단지 신적인 삶에 참여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 인간 안에도 하느님의 형상이 형성될 수도 없고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도 없었을 것이라 말합니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안토니우스는 각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의 승리가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나는지를 보여 주는 살아 있는 표본이었습니다. 안토니우스의 고행은 단지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는 스토아적 영웅주의가 아닌, 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안토니우스 안에서 이루신 죽음과 어둠의 극복을 의미했습니다. 안토니우스는 피조물 안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업적을 드러내는 모범이자,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이 실제 삶 속에서 실현된 전형적 인물이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안토니우스를 가리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이 하느님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증거한 그리스도인의 모범이며, 모든 수도자의 이상을 보여 준 인물이었습니다.
빛을 비추는 삶
“정치적 승리는 그리스도교의 승리를 보장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리스도 자신의 승리를 보장합니다.”
아타나시우스와 안토니우스, 두 성인의 삶은 현대 그리스도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변증’(apologetics)의 논거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증거”라는 커다란 가르침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