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한민택 신부입니다.
시작 기도로 1요한 4,7-8 말씀을 읽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피정을 시작하며 우리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발견의 가장 좋은 출발점은 ‘가정’이 아닐까 합니다. 나에게 가정이란 어떤 곳인가요? 소중한 생명을 선사해 준 곳, 나라는 존재가 형성된 곳입니다. 그런데 소중한 추억이 서려 있는 만큼, 많은 애환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가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돌볼지 다시 질문하게 됩니다.
가정은 오늘날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제14차 세계주교시노드(2014~2015)의 주제를 ‘교회와 현대 세계에서 가정의 소명과 사명’으로 정하셨고, 그 결과로 〈사랑의 기쁨〉이라는 문헌을 반포하셨습니다. 교황님의 우려대로 가정의 위기는 계속해서 심각해지고 있고, 교회 내에서도 특별한 대책이 없는 것 같아 걱정스럽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가정에서 겪는 어려움들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교황님은 〈사랑의 기쁨〉에서 가정을 위한 새로운 사목 방향을 제시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상에 현실을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과 한계로 가득한 현실에서 출발하여 하느님께서 열어 주시는 은총의 길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가정도 이상적인 가정과 비교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은총의 길이 열림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자렛 성가정에서 발견하는 가정의 의미
교황님은 문헌에서 부부간의 인간적 사랑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전해 주십니다. 한 대목을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빛과 그림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 저는 상대방의 사랑의 진가를 알려면 그 사랑이 완벽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은 자신의 능력껏 최선을 다하여 나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사랑이 완벽하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랑이 거짓이라거나 참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한계가 있고 현세적이라고 하여도 그 사랑은 참된 것입니다. …… 사랑은 불완전함을 지니고 용서하며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113항)
가정과 혼인 관계 안에서 우리는 인간적 사랑의 한계를 종종 경험합니다. 그러나 사랑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그 사랑이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의 사랑이 인간적이기에 나약하고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줄 뿐입니다. 때로는 시대적, 문화적 상황 속에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했던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충실히 사랑하려고 애쓸 것이므로, 이 인간적 사랑의 한계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겪는 사랑을 새로운 눈, 곧 자비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상적인 기준으로 과거를 비판하거나 부정하기보다 현실 속에서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시선으로 나자렛 성가정을 바라볼 때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흔히 이상적인 가정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나자렛 성가정은 위기 속의 가정이었습니다. 사회적으로 보면 마리아는 미혼모로 오해받아 파혼의 위기를 겪을 뻔했고, 죽음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피난을 가야 했습니다. 돌아와서는 이방인의 고장 갈릴래아의 나자렛에 정착해야 했고, 유년 시절 예수님을 잃은 일까지 있었습니다. 이 가정은 늘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가정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들이 삶에서 겪는 모든 도전을 피하지 않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서 정면으로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가정이 ‘기도하는 가정’이었고, ‘순례하는 가정’이었으며,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위대한 일을 마음속에 늘 간직하는 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겼다.”(루카 2,19) 하느님의 손길은 도전과 문제를 회피할 때가 아니라, 바로 그 ‘한가운데서’ 직면할 때 작용하십니다.
이러한 시선을 통해 우리 각자의 가정도 새롭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경험한 어려움과 시련 등은 개개인의 잘못만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나약함과 한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나약하고 한계 지어진, 위기 속의 가정에서 우리의 소중한 생명, 신앙, 성소가 싹트고 자라난 것입니다. 이제 스스로에게 물어봅시다. 우리 각자가 경험한 가정은 어떤 가정이었나요? 그리고 우리 각자의 삶에 어떻게 각인되었나요?
가정의 사명은 무엇일까?
가정에 대한 새로운 시선이 눈길을 끕니다. 가정이 단순히 ‘물리적 장소’나 ‘사회적 장소’가 아닌,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곳, 다시 말해 생명이 전달되는 곳이라는 접근입니다. ‘나’라는 인간이 태어나고 성장한 곳, 생명이 탄생하고 나약한 생명을 돌보고 자라게 한 곳이 가정이며, 그 생명이 가정을 떠나 새로운 가정을 만들고 또다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그렇게 가정을 통해 ‘전달’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탄생하여 한 인격적 주체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놀랍고 신비롭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해낼 수 없는 일이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작용한 결과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이렇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가정은 거룩한 곳이며, 그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가정에 주어진 사명입니다.
생명 전달의 4단계
자연스럽게 ‘생명을 전달하는 기쁨’이라는 주제에 근접하였습니다. 한 인격적 주체가 탄생하는 과정의 신비로움은, 우리 자신이 잉태되고 탄생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교황청 문화평의회 2015년 총회의 주제는 “여성 문화, 평등과 차이”였습니다. 이 총회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제네러티비티(generativity, 생육성生育性)’라는 신조어를 사용하셨습니다. 당시 총회에서 이 생육성 개념을 잘 풀어 주신 분이 프랑수아 부스케 몬시뇰입니다.
몬시뇰은 〈생육성: 생명을 전달하는 기쁨〉이라는 글에서, 생명 출산의 중요한 4단계를 설명하십니다.
“생명을 갖고자 열망하고, 생명을 세상에 탄생시키며, 생명을 돌보고, 그 생명이 떠나도록 내버려둔다.”(《여성 문화: 평등과 차이》,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93쪽)
생명 전달 과정에서 열망과 포기가 독특하게 눈길을 끕니다. 몬시뇰은 ‘열망, 탄생, 돌봄, 포기’라는 네 단계를 상세히 설명하신 다음, 각각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바로 거기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한다는 것입니다. 생명 전달의 주체는 바로 하느님 당신이십니다.
생명 전달의 4단계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어떠한 사랑의 결과인지 잘 설명해 줍니다. 그것은 생명을 그토록 열망하고 낳아 준 사랑이요, 보살피고 성장하도록 아낌없이 내어 준 사랑이며, 그 사랑의 자유를 인정하며 떠나도록 포기하는 사랑입니다. 아주 인간적인,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 안에 함께하시기에 아주 거룩하고 신적인 사랑! 바로 거기에 ‘기쁨’이 자리합니다.
그 기쁨은 열망하고 탄생하고 돌보는 것뿐 아니라 포기하는 것에 자리합니다. 포기하는 기쁨! 새로운 생명을 위해서는 가도록 놓아주어야 합니다. 포기야말로 하느님께서 창조를 지속하시는 힘입니다. 포기하는 기쁨은 자기를 지우는 기쁨이기도 합니다. 나라는 존재는 그러한 놀라운 사랑, 놀라운 기적의 결과입니다. 육화(肉化)와 구원의 역사는 이 과정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놀랍지 않은가요? 생명이 전달되는 과정이, 그리고 우리가 그 과정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생명 전달의 과정을 들으며, 다음과 같은 시를 써 보게 되었습니다.
“여성이여! 어머니여! 당신의 몸이 얼마나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적합하게 되어 있는지 깨달으십시오! 다만 출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생명이 잉태되고 탄생하며 성장하도록 보살피고 급기야 새로운 생명을 위해 떠나도록 놓아주는 것까지……. 얼마나 많은 희생과 고통이 따릅니까? 얼마나 놀라운 신비를 경험합니까? 얼마나 복된 몸이요, 마음입니까? 하느님을 닮은 몸이여, 마음이여!”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
생육성은 혼인과 가정만이 아닌 교회 삶의 원리이기도 합니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생명 전달의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생명을 열망하고, 생명이 탄생하며, 생명을 돌보고 생명이 떠나도록 놓아주는 일. 우리 가정에서, 교회에서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지 이보다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속한 교회, 모임과 공동체를 다른 눈으로 보게 됩니다. 공동체는 또 하나의 가정, 또 하나의 교회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수도 공동체 안에서, 내가 만나는 사람들 안에서 생명 전달의 기쁨을 살고 있나요? 생명을 전달하시는 하느님을 만나고 있나요?
생명 전달에 관한 묵상은 우리 각자의 삶에 대한,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에 대한 묵상이기도 합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이 긴 족보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는 육화의 의미를 더 깊이 숙고하도록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실 때 한 인간으로, 한 왕가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서, 남을 섬기는 왕으로서 말입니다. 성탄은 출발점이 아니라, 부활과 구원을 체험한 신앙의 눈으로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며 다시 발견한 구원의 신비인 것입니다. 어떻게 인간 역사에 구원이 들어왔는지, 빛이 비쳤는지, 구원이 어떻게 준비되고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밝혀 주는 축제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인간의 족보 즉 세대 간의 유대를 통해 활동하심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예수님만이 아니라 각자의 삶에서도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 집안에, 나의 삶에 어떻게 하느님께서 들어오셨나요? 어떻게 생명 전달과 함께 구원이 깃들어 나에게까지 오게 되었을까요?
생명의 전달에 대한 묵상은 우리가 어떤 사랑의 결과인지, 어떤 사랑으로 초대받았는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나라는 생명, 나라는 선물이 주어질 때 전 우주가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음을 알고 있나요? 나의 잉태와 탄생, 양육과 포기에 이르기까지 어떤 기다림과 기대, 기쁨과 환희, 희생과 포기가 있었는지를 헤아릴 수 있나요?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께서 어떤 사랑으로 우리를 열망하고, 낳으시고, 돌보고,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로 바로 서도록 동반하시는지를.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비롯한 수많은 이의 사랑에, 그리고 그 안에서 활동하신 하느님의 사랑에 보답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시선은 우리 자신을 이전과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 자신, 우리가 살아온 삶,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있던 모든 일들, 가정에서의 탄생과 성장기, 혹은 부모님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사회생활이나 수도 생활을 선택한 이후 나의 삶……. 이 모든 것은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 두고 살아왔던 감정들을 해결할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가족들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화해하며, 내 안의 기억과 감정과 화해할 것을 말입니다. 이는 어쩌면 우리들 각자의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를 찍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피정의 가장 큰 주제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했지만 하느님께서 우리가 알고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앞서 우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셨고,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수 있도록 준비하셨으며, 태어나 성장하고 살아오는 동안 놀라운 섭리로 함께하시며 이끌어 주셨음을 다시금 발견하는 것입니다.
변화의 출발점은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기 전에 이미 하느님께서 먼저 사랑하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수많은 사람의 손길을 매개로 나에게 전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특히 가정과 가족 구성원들의 소중한 사랑과 끈끈한 관계를 통해서 말이죠.
여러분, 함께 묵상해요! 🙏
· 마태오 복음서 1장 18절~2장
· 루카 복음서 1장 26절~56절, 2장
위 구절을 묵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 생명 전달의 과정 안에 들어오셔서 구원 역사를 이루셨듯이, 우리 각자의 구체적인 삶 안에 오시어 생명을 선사하시고 잉태하시고 성장시키시고 스스로 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주님의 손길을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