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예식이 되다

영성과 신심

삶, 예식이 되다

매 순간을 경축하고 거행하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삶의 방식

2025. 10. 31
읽음 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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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지난 편을 안 보셨다면, 먼저 읽어 보시길 추천해요.

<우리 피정 갈까?> 시리즈

‘1화 우리, 피정 갑시다!’

‘2화 부르심의 매력이란?

‘3화 생명을 전달하는 기쁨

 


 

안녕하세요, 한민택 신부입니다.

오늘 강의는 로마서 121절의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오늘은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 그 삶을 거행’(경축, 기념)할 것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과 삶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그 삶을 복되게 경축하고 기념하는 법을 찾고자 합니다. 소중한 생명에 걸맞은 예를 갖추고, 나의 삶을 더욱 복된 삶으로 주님께 봉헌하기 위해 말이죠.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신학적 인간학이라는 신학 과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이해하는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물음에 답하는 과목입니다. 우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사목 헌장〉의 한 대목을 읽어 봅시다.

 

새 아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신비와 그 사랑의 신비를 알려 주는 바로 그 계시 안에서 인간을 바로 인간에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 주시고 인간에게 그 지고의 소명을 밝혀 주신다.”(22)

 

문헌에 따르면, 우리는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특히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그 뒤를 이은 교회가 우리에게 알려 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이에 대한 교부들의 공통된 가르침을 바리용 신부님이 정리하신 적이 있습니다. 신이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이 되게 하기 위해서다.”(《흔들리지 않는 신앙》, 생활성서사, 22)

 

() 레오 교황님께서 성탄 강론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여러분의 품위를 인식하고 이제 하느님의 본성을 함께 나누어 받게 된 자들로서 부패한 행실로 말미암아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십시오.”

 

프랑스 신학자 베르나르 세스부에 신부님은 당신의 그리스도교 인간학 저서의 제목을 《롬므, 메르베유 드 디유L’homme, merveille de Dieu라고 지었습니다. 하느님의 경이로운 존재인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놀라운 피조물이자 걸작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토록 경이로운 존재로 창조하셨으며, 우리와 사랑의 친교를 나누고 구원하시기 위해 직접 인간이 되시어 우리를 찾아오셨다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해마다 지내는 성탄 축제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지만, 인간을 위한 축제이기도 합니다. 성탄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일깨우고 고양해 주는 축제인 것입니다.

 


 

삶을 거행하다

 

다시 원래의 주제로 돌아옵니다. 부름을 받은 존재로서의 나 자신에 더 깊이 다가가기 위해 삶의 거행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삶을 거행한다는 말, 무슨 뜻일까요? 삶에는 예식의 차원이 있으며, 그 차원은 인간의 삶을 다른 차원으로 고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 존재와 삶을 축제와 예식처럼 하느님께 올려 드릴 때 우리 삶은 더욱 빛을 발할 것입니다.

 

프랑스에서 유학할 때 친하게 지냈던 텔리에 신부님이 계십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한국에서 선교사 생활을 오랫동안 하셨으며, 제가 만났을 당시에는 파리에서 공부하는 아시아 유학생들의 논문을 교정해 주고 계셨습니다. 몇몇 아시아 신부님들과 함께 외식이나 산책을 하러 갈 때마다 신부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Il faut célébrer l’existence!(삶을 거행해야 한다!)” 다른 신부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바오로의 프랑스어 애칭)! 재미있고 기쁘게 살지 않으면, 우리 삶은 망한 거야.”

 

삶은 예식처럼 경축하고 거행해야 할 대상입니다. 예식에는 일상을 벗어난 장소가 있고, 음악이 있고, 말씀이 있고, 상징이 있고, 함께 모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서가 아닌 이웃과 함께 살고, 삶에 함께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삶의 의미가 달라짐을 경험합니다. 텔리에 신부님의 말씀은 우리가 받은 생명과 삶의 가치를 드높이자는 뜻이었습니다. 예식은 무미건조한 삶에 자양분이자 향신료가 되고 삶의 가치를 드높여 줍니다.

 

사실 예식은 우리 삶 곳곳에 존재합니다. 가장 평범한 일상의 순간부터 환희에 찬 순간, 비극적인 순간까지 우리 삶은 예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러한 예식들은 삶을 풍요롭게 하며,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만약 예식이 없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나의 생일을 기억하고 축하해 주는 이가 없다면? 결혼식이 없다면? 만약 가장 소중한 가족이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을 치르지 않는다면?

 

삶의 첫 순간부터 지금까지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날들을 기다리며 우리의 삶을 예식으로 승화시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예식과 함께하는 구원의 역사

 

벨기에 신학자이자 양성가인 가브리엘 글레(Gabriel Ringlet)는 저서 《유일한 날들의 은총: 의식 거행의 찬양LA GRÂCE DES JOURS UNIQUES: Éloge de la célébration》에서 의식(예식)은 빵과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살아감에 있어 빵이 필요한 것처럼. 의식은 인간으로 살기 위해 필요한 양식이라는 거죠. 우리 각자가 의식의 거행자가 되어, 삶의 끝에 이르기까지 삶을 의식으로 채워야 한다고 합니다.

 

호스피스 병원에서의 기억을 떠올립니다. 어머니의 마지막을 호스피스에서 함께하면서 이곳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호스피스란 보통 생각하듯 죽으러 가는곳이 아니라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한 곳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소중한 가족들이 방문하여 함께 시간을 보내는 특별한 예식이 이루어집니다. 화해가 이루어지고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함께 울며 다시금 소중한 삶을 경축하고, 영원한 생명을 위해 준비합니다.

 

성경의 구원 역사를 보면, 다양한 예식들이 등장합니다. 가령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장 참조)가 있습니다. 잔치에 걸맞은 포도주 이야기가 이어지며 흥겨운 삶을 은유적으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 주는 흥겨움, 기쁨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동방 박사들은 긴 여정 끝에 베들레헴에서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고 예물을 봉헌하였습니다. 밤새 양을 지키다 천사의 인도를 받아 베들레헴 마구간을 찾아간 목자들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아기가 태어난 지 40일 되던 때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예수님을 봉헌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인간이 겪는 모든 순간을 함께 겪으며, 예식을 통해 그 순간들을 고양시키셨음을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또한 회당에서 유다교 예배에 참여하셨으며, 그곳에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의 끝자락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함께하셨습니다. 당신께서 걸으실 수난의 길을 예식의 차원으로 이해하셨습니다. “내가 받아야 하는 세례가 있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짓눌릴 것인가?”(루카 12,50) 제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모셔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예식에 함께하심으로써, 예식을 신적인 차원으로 높여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 삶의 모든 예식은 육화하신 하느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을 하느님과 함께하는 신적인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삶은 하느님과 우리가 함께 써 가는 아름다운 이야기, 구원의 역사로 길이 남게 될 것입니다.

 


 

삶을 고양시키는 힘, 예식

 

우리 삶을 돌아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떠한 예식을 거행하였나요? 어떠한 예식이 우리의 삶을 고귀하게 고양시켰나요?

 

부모님의 약혼식과 혼인 예식, 이어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의 기대와 축복 속에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백일잔치, 돌잔치. 또 자라면서 많은 예식을 접하게 됩니다. 입학식, 졸업식, 방학식, 개학식. 그러고 보면 일곱 가지 성사도 우리 삶에서 결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예식들입니다. 수많은 예식이 우리 삶을 채워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중요한 순간을 각인시켰습니다. 예식은 또한 우리 삶의 가장 비참한 순간도 함께했습니다. 혹은 그러한 순간들은 하느님 안에서 예식의 차원으로 승화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정을 통해, 고해성사를 통해, 병자성사를 통해….

 

우리 각자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예식을 거행했나요? 그중 내 마음에 가장 인상 깊이 남은 예식은 어떤 것인가요? 저의 가장 아름다운 혼인식이라는 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날 본당에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어떤 형제님께서 많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신부님을 뵙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이 청하신 것은 병자성사가 아니라 혼인성사였습니다. 뭐라고요? 병원에서 혼례를요?

 

사연은 이러했습니다. 형제님께서는 지금 중병으로 입원해 계신데, 그분께 평생의 한이 된 것이 있다면 성당에서 혼인식을 못 올리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분은 젊은 시절 신앙생활을 멀리하던 중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결혼했습니다. 신자로서 마땅히 성당에서 혼례를 올려야 했음을 알았지만 여러 사정으로 그러지 못한 채 한평생을 살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혼례를 정식으로 올리지 못했다는 것이 평생의 한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병원에 입원해 나날이 병색이 짙어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형제님은 지난 50년 동안 못 이룬 아내와의 혼례를 하느님 앞에서 올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과 아내에게 짊어지고 있던 평생의 마음의 짐을 덜어 버리고자 함이었습니다.

 

제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두 분은 약간 상기된 모습으로 기다리다 저를 아주 반갑게 맞아 주셨습니다. 차례로 고해성사를 하고 혼인 예식이 아주 작은 병실에서 거행되었습니다. 하객은 두 증인과 몇몇 신자분들이 전부였습니다.

 

두 분은 혼인 생활을 하면서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습니까?” “, 사랑하고 존경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을 아내(남편)로 맞아들여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아플 때나 일생 신의를 지키며 당신을 사랑하고 존경할 것을 약속합니다.” 평소에 무심코 읽기도 했던 이 말들이 구구절절 가슴속 깊이 와닿았습니다. “나의 사랑과 신의의 표지로 당신께 드리는 이 반지를 받아 주십시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드립니다.”

 

서로 언약의 반지를 끼워 주는 두 부부의 눈에는 어느덧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혼인 축복으로 그들이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로서 하느님 안에 결합된 노부부는 성체성사를 통해 주님의 사랑에 완전히 일치하였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침묵 속에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 예식을 거행하는 동안 내내 행복해하던 모습은 그들의 사랑이 아픔도 병도 죽음도 뛰어넘는 지고한 사랑이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두 분은 우리가 성당에서 올리는 혼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또한 몸소 보여 주는 사랑의 증인들이었습니다. 이 혼인은 지금도 제게는 잊지 못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혼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 수원교구 월간지 〈외침〉 中

 


 

봉헌하는 삶

 

교회는 보편 사제직에 대해 가르칩니다. 우리 모두 세례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났으며, 예수님의 사제직에 참여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사제가 희생 제물을 봉헌하듯, 우리도 미사 때 우리의 삶을 예물로 봉헌해 드리며 사제직에 참여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나의 삶을 희생 제물로 봉헌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주신 나의 삶을 아름다운 예식으로 거행할 수 있다면, 매 순간이 주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 되지 않을까요?

 

나는 이미 하느님께 올리는 포도주로 바쳐지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날 때가 다가온 것입니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 나만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타나시기를 애타게 기다린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2티모 4,6-8)

 

우리 각자 삶을 거행하도록, 그 삶을 하느님께 봉헌하도록 초대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봉헌의 삶을 살고 있나요? 어떻게 예식을 준비하고 있나요?

 


 

여러분, 함께 묵상해요! 🙏

 

· 마태오 복음서 21~12(동방 박사들의 예수님 경배)

· 루카 복음서 215~20(목자들의 예수님 경배)

 

위 구절과 다음 질문을 묵상해 봅시다. 나는 나의 삶을 어떻게 예식으로 거행하고 있나요? 나는 나의 구원을 경축하는 예식인 미사에 어떻게 참여하고 있나요?

 

 

 

Profile
수원교구 사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이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습니다. 축구와 글쓰기를 즐기며, 교회 쇄신과 시노달리타스 구현, 젊은이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 희망의 신학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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