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히 자리 잡은 세속화, 눈과 귀를 사로잡는 즐길 거리, 예전에 비해 상당히 가벼워진 참회의 재계. 사순 시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흐리게 하는 요소들은 곳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사순 시기는 전례주년의 다른 어떤 때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시기로 남아 있습니다.
교회는 사순 시기에 “전례의 ‘오늘’ 안에서” 구원 역사의 큰 사건들을 다시 읽고 생생하게 되살립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95항). 이 시기는 특별히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때”(〈전례주년과 전례력에 관한 일반 규범〉 27항), 비유하자면 “파스카의 거룩한 산으로 올라가는 은혜로운 때”입니다(《주교 예절서》 249항). 구체적으로는 “세례의 기억이나 준비를 통하여 또 참회를 통하여…… 더 열심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에 전념하며 파스카 신비의 경축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전례 헌장 109항).
‘세례 요소’와 ‘참회 요소’는 사순 시기를 지탱하는 두 기둥입니다. 그러한 까닭에 파스카 성야에서 받게 될 세례를 준비하며 단계별 입교 예식을 거치는 예비 신자들은 사순 시기를 집중적인 영성 훈련 기간으로 삼습니다.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예비 신자들의 여정을 함께 걸으며 자신이 받은 세례의 참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극기의 훈련으로 “악의 세계와 맞서 싸우는 보루”를 열심히 쌓습니다(재의 수요일 본기도).
사순 시기에 관한 교회 문헌들은 사순 시기가 노리는 ‘과녁’을 명확히 합니다. 바로 파스카 축제, 파스카 신비의 거행입니다. 사순 시기 전례 기도문들은 우리가 이 목표를 향해 가고 있음을 끊임없이 일깨웁니다. 사순 시기의 문을 여는 재의 수요일에 사제는 교우들의 머리에 얹어줄 재를 축복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비천한 사람을 굽어보시고
속죄하는 사람을 용서하시니
저희 기도를 자애로이 들으시고
이 재를 머리에 받으려는
하느님의 종들에게 ✠ 강복하소서.
저희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순 시기의 재계를 충실히 지키고
마음을 깨끗이 하여
성자의 파스카 축제를 잘 준비하게 하소서.
사순 시기가 끝나갈 무렵 주님 수난 성지 주일에 행렬용 나뭇가지를 축복하는 예식에서 사제는 이런 말로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우리는 사순 시기 처음부터
참회와 사랑의 실천으로 마음을 준비하였고
오늘 교회와 함께 주님의 파스카 신비의 시작을 알리고자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수난과 부활의 이 신비를
완성하시려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교회가 사순 시기의 모든 날을 ‘파스카 신비’라는 실 하나로 꿰고 있다면, 기도, 성경 독서, 단식, 자선, 그밖에 모든 극기 행위 등 사순 시기에 우리가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비밀을 여는 열쇠는 다름 아닌 ‘파스카 신비’에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파스카 신비, 건너감의 신비
파스카 신비는 한마디로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과 승천의 신비’입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067항 참조). 그리스도께서 수난과 부활과 승천으로 이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께로 건너가신 신비이며,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죄의 세계에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품으로 건너가는 신비입니다.
구약의 파스카 거행이 이집트 종살이에서 약속의 땅으로 건너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을 기념했다면, 신약의 파스카 거행은 죄의 종살이에서 참된 자유의 세계로 건너가는 하느님 백성의 여정을 기념합니다. 구약의 파스카도 대단한 사건이었지만 그것은 오로지 신약의 새 파스카를 미리 알리는 깃발이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신”(요한 13,1 -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 복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이르자 당신 피로 날인하신 새 계약의 성사를 세우셨고, 수난과 부활과 영광스러운 승천으로 두 번째이자 궁극의 ‘출애굽’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로써 마귀의 종살이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 생활로 건너가는 다리, 죄의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우리 앞에 놓였습니다.
여기서 한 걸음 물러나 왜 이런 ‘다리’가 필요한지, 예수님께서 애초에 왜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야 하셨는지 생각해 봅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한처음에”(창세 1,1), 콕 집어 말하자면 첫 사람이 지은 죄에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 따르면, “원죄 교리는 …… 복음의 ‘이면’(裏面)”입니다(389항). 새 아담이신 예수님의 ‘기쁜 소식’은 첫 아담의 ‘나쁜 소식’을 알고 있어야 그 진가가 드러난다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게 해 준다.’라는 뱀의 유혹에 걸려 넘어졌습니다(창세 3,5 참조). 그들은 하느님과 비슷하게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되었기에(창세 2,26) 그 자체로 하느님처럼 지내고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자신의 그런 처지를 무시하고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서”(《가톨릭 교회 교리서》 398항) 하느님처럼 되기를 바란 것, 그것이 원죄의 본질이며 나쁜 소식의 정체입니다.
이 원죄의 영향이 하느님 없이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는 우리 인간의 근본 조건을 결정짓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한없이 좋은 것을 바라면서도 한없이 나쁜 것에 물들고 마는 모순적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처지를 자신의 체험에 빗대어 쉽게 풀이해 줍니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로마 7,18-21)
땅과 하늘, 그리고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심연이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하느님의 세계로 건너갈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 속에 살고 있는 셈입니다. 참된 진리와 선을 추구하는 모든 인간에게는 반대편으로 건너가게 해 주는 다리가 필요합니다.
영적 사십 일
이 건너감의 신비를 거행하는 파스카 축제는 전체 전례주년의 정점입니다. 사순 시기의 구조와 흐름은 그 시작부터 주님 부활 대축일을 위한 준비로 마련되었습니다. 4세기 후반에 로마 교회의 사순 시기가 형성되었을 때, 이 전례 시기는 사순 제1주일을 시작하여 5주를 꽉 채운 다음, 주님 수난 성지 주일부터 성주간 목요일까지 5일을 더해 정확히 40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축일을 단식으로 준비하는 관습 아래 살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이 중요한 시기를 단식으로 시작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전례 시기와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는 기쁨의 날인 주일은 단식하지 않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6세기 초에는 전통적인 단식 일인 수요일, 곧 오늘날 우리가 아는 ‘재의 수요일’로 사순 시기의 시작이 앞당겨졌습니다. 신자들의 거룩한 갈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순 시기(Quadragesima)에 들어가기 전 주일을 오순 주일(Quinquagesima)로 삼고, 또 그 앞에 육순 주일(Sexagesima), 한 번 더 그 앞에 칠순 주일(Septuagesima)을 추가하여 사순 시기 전 모두 3주간의 단식을 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구조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문을 연 전례 쇄신으로, 사순 시기는 초기의 단순한 구조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재의 수요일 전통이 주는 선익은 보존하여, 이제 사순 시기는 재의 수요일부터 파스카 성삼일을 여는 성목요일 주님 만찬 미사 전까지 이어집니다. 따라서 현행 사순 시기의 날수는 총 44일입니다. 사순(四旬), 곧 사십 일이라는 단어의 정확한 뜻에는 맞지 않지만 성경에 나오는 모든 40일의 신비, 특히 “광야의 예수님 신비와 결합”하는(《가톨릭 교회 교리서》 540항) ‘영적 40일’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실제 사순 시기는 음력과 연결된 주님 부활 대축일 날짜를 기준으로 삼아, 2월 2일부터 3월 10일 사이에 오는 어느 수요일에 시작하여 3월 19일부터 4월 22일 사이에 오는 어느 목요일에 끝나게 됩니다. 다른 전례 시기에 비해 사순 시기에는 축일과 대축일이 거의 없다는 사실, 성 요셉 대축일(3월 19일)이나 주님 탄생 예고 대축일(3월 25일)이 사순 시기의 주일에 오면 이 대축일 거행이 다른 날로 미뤄진다는 사실을 보면 교회가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사순 시기를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
파스카 축제를 준비하는 사순 시기는 개인적, 공동체적 쇄신의 길입니다. 사순 시기는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그리스도의 모습을 더럽히거나 왜곡하는 모든 것을 끊어버리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묵은 누룩, 곧 악의와 사악이라는 누룩이 아니라, 순결과 진실이라는 누룩 없는 빵을 가지고 축제를 지냅시다”(1코린 5,8 – 주님 부활 대축일 낮미사 제2독서).
사실 사순 시기 이후의 삶은 이전과 같을 수 없는데, “묵은 누룩”을 치워 버리고 “순결과 진실”로 새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순결과 진실”을 재는 잣대는 복음의 잣대, 곧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태도입니다. 예언자가 목소리 높여 선포하는 주님의 말씀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순 시기가 어떠해야 하는지 우리에게 따져 묻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제1독서)
우리는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아니 외려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자신을 새롭게 합니다. 이 사랑과 쇄신의 최종 결론은 언제나 하느님입니다.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이사 58,8-9).
그러므로 사순 시기를 올바로 지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느님 말씀, 특히 교회가 이 전례 시기에 듣도록 지정한 성경 말씀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탈출기나 예레미야서 같은 성경의 한 권을 통독하거나 ‘렉시오 디비나’ 해 보는 것도 크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주일과 평일 미사의 독서와 복음, 성무일도의 독서기도에 나오는 사순 시기 성경 본문을 더 주의 깊게 읽는 것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기도하게 됩니다. 말씀을 듣는 것이 모든 기도의 원천입니다. 하느님의 위업과 자비에 대한 찬양과 감사의 기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들추시고 고발하시는 죄의 용서를 구하는 탄원의 기도,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들, 특히 가난하고 힘없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불의에 고통받는 이들, 의지할 곳이 하느님밖에 없는 이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도록 하느님의 은총과 도움을 청하는 전구 기도가 거기서 흘러나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더 주의 깊게 듣는 사순 시기는 기도와 전례에 더욱 관심을 기울이는 시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순 시기의 또 다른 특징은 단식입니다. 단식은 사순 시기와 거의 동일시될 정도로 이 전례 시기를 물들이는 특별한 색깔입니다. 그리스도교 단식은 그 자체로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금욕적 수행과는 다릅니다. 사순 시기 안에서든 밖에서든 그리스도교 단식은 스스로 부과하는 참회의 형벌이 아닙니다. 신체나 음식에 대한 경멸은 더더욱 아닙니다. 음식과 음료를 스스로 삼가는 것은 절제의 덕입니다. 특정 시기에 단식하는 것은 우리 안에 이러한 덕이 살아 있도록 점검하는 방법이며, “방탕과 만취로 마음이 물러지는 일”(루카 21,34)을 피하고 본능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거나 다시 찾으려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종교와 문화를 막론하고 모든 영적 스승은 마음을 가볍게 유지하고 몸을 혹사하지 않는 것을 권고하며, 절제 없이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음을 아는 신중함과 분별력을 촉구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단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의 영적 수행이며, 이것이 바로 교회가 단식을 결코 고립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언제나 기도 및 사랑의 실천과 연결해서 말하는 까닭입니다.
파스카의 산을 오르는 기쁨
사순 시기는 진지함과 엄숙함이 느껴지는 기간입니다. 실제로 대영광송, 알렐루야, 제대 장식 등 기쁨을 활짝 드러내는 표지들을 삼가는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 사순 시기가 주는 고유한 기쁨도 있습니다. 사순 시기가 심각하고 엄중한 이유는 개인과 교회가 개인적, 집단적 죄로 인해 흐려지고 변질된 하느님의 모상을 직면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붙들고 우리 자신을 들여다봄으로써가 아니라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을 묵상함으로써 이러한 인식을 얻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죄를 고발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합니다. 사순 시기에 줄곧 울려 퍼지는 회개의 촉구는 우리를 내리누르고 우리 얼굴을 땅에 처박는 선언이 아니라 다시 한번 일어서라는 부르심입니다. 파스카 축제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순 시기에 삼가는 기쁨의 외적 표지들은 절제 속에서 우리의 기쁨이 무르익어 파스카 성야에서 힘차게 터져 나올 그 알렐루야가 이 집 저 집, 세상 곳곳에 끝없이 울려 퍼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