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바라느냐?

영성과 신심

무엇을 바라느냐?

바람, 우리를 우연적인 존재에서 필연적인 존재로 만들다

2025.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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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지난 편을 안 보셨다면, 먼저 읽어 보시길 추천해요.

<우리 피정 갈까?> 시리즈

'1| 우리, 피정 갑시다!

'2| 부르심의 매력이란?'

'3| 생명을 전달하는 기쁨'

'4| , 예식이 되다'

 


 

안녕하세요, 한민택 신부입니다.

먼저 시작 기도로 1코린 13,7 말씀을 듣겠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엄격주의는 성직자와 수도자가 빠지기 쉬운 유혹입니다. 그러나 이는 모든 신앙인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입니다. 진정 자유롭고 기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엄격주의와 결별해야 합니다. 엄격주의란 자신의 바람과 의지를 지나치게 억누르는 태도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무겁고 부담스럽고 생기 없게 만듭니다. 사실 신앙생활은 기쁨으로, 유머와 균형 감각으로 힘과 생기를 얻습니다. 신앙은 우리의 바람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바라는 대상을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교회 문화에서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은 부정적으로 비치곤 합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이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에만 순종하며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억제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생각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십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우리를 필연적 존재로 만드는 것

 

자신이 바라는 대상을 찾아가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맹목적으로 순종하기만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자녀가 바라는 것을 들어주며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이 부모 마음이듯, 하느님께서도 바라고 청하는 자녀를 보며 기뻐하십니다.

 

프랑스 유학 시절, 영성 지도 신부님께서 제게 늘 하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넌 무엇을 바라니?”

 

사람들에게 바람을 묻지 않는 문화에서 살아왔기에, 그 질문이 무척 낯설고 당혹스러웠습니다. ‘내가 정말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먼저 우리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대상이라는 사실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는 먼저 인간을 우연적인 존재로 경험합니다. 우리는 살아오면서 다양한 사건 사고를 접해 왔고, 그 안에서 어처구니없이 사라져 가는 수많은 생명을 목격하였습니다. 이러한 인간 존재의 우연성에 대해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정녕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야경의 한때와도 같습니다. 당신께서 그들을 쓸어 내시면 그들은 아침 잠과도 같고 사라져 가는 풀과도 같습니다. 아침에 돋아났다 사라져 갑니다. 저녁에 시들어 말라 버립니다.”(시편 90,4-6)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려던 갈릴래아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한 일을 여쭙고자 예수님께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을 함께 언급하며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5)

 

우리는 여기에서도 인간의 우연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연성과는 다른 면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바람입니다. 노사연 씨의 노래 만남에 이런 가사가 있습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바람)이었어.” 맞습니다. 우연적 존재를 필연적 존재로 만드는 것은 바람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사라지는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누군가 바라는 대상이 될 때 우리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연적인 존재가 됩니다. 바람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며, 사랑은 모든 것을 바꿉니다. 바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연적인 존재란 없습니다. 특히 하느님께 우리가 그러합니다. 수십 명이 모여 찍은 단체 사진에서도 부모가 자식을 금세 알아보듯이, 우리도 하느님께서 사랑스럽게 눈여겨보시는 존재입니다.

 


 

바람을 깨우다

 

시편 저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사람이란 그 세월 풀과 같아 들의 꽃처럼 피어나지만 바람이 그를 스치면 이내 사라져 그 있던 자리조차 알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자애는 영원에서 영원까지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 위에 머무르고 그분의 의로움은 대대에 이르리라,”(시편 103,15-17)

 

시편 저자의 말씀처럼, 우리는 하느님께서 자애와 사랑을 베푸시는 존재,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존재입니다. 그렇기에 그저 나타났다 무의미하게 사라지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 없어서는 안 되는 필연적 존재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 만물을 돌보시며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느님께서 그토록 바라시고 사랑하시는 존재가 우리 자신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가요. 생명을 전달하는 기쁨, ‘생육성generativity’ 또한 인간이 단지 생물학적·진화론적 산물이 아닌, 하느님께서 간절히 열망하고 바라시는 존재임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이 경험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그분의 사랑을 접한 제자들은 자신이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과 만나기 전부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바라고 눈여겨보셨으며, 그들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사랑의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했으며, 그 사랑으로써 새로 태어남을 경험했습니다. 이제 그 사랑은 제자들에게 삶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삶은 오직 그 사랑을 전하기 위해 존재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처럼 온 삶을 바쳐 그 사랑을 증언하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든 것은 지금 우리를 향한 그분의 바람과 사랑의 손길입니다. 인간을 향해 다가오심, 인간을 향한 가엾은 마음과 눈길, 인간을 향해 건네시는 말씀, 자비 가득 담긴 그분의 모든 눈길, 몸짓, 음성이 인간 마음에 와닿아 진심이 전해지면 인간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변화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전 사람들에게 다가가셨듯,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무엇을 바라는지 물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믿음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하느님 아버지와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 그들 안의 믿음을 회복시키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도록 이끄시는 일의 핵심은 이 바람을 깨우는 것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오르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예리코를 떠나실 때 만났던 바르티매오 이야기를 묵상해 봅니다(마르 10,46-52 참조). 예수님께 자비를 청했던 눈먼 거지바르티매오의 외침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불러오너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당신 앞에 선 그에게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10,51)

 

그러자 그가 답합니다.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0,51) 앞을 볼 수 없던 바르티매오에게 다시 본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의미했습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매일 같은 절망을 반복하던 그는 그 삶에 마침표를 찍고 싶었습니다. 새로운 삶을 살고 싶었던 그는 마음속 깊은 바람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함께 그 바람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이 그의 마음에 믿음을 회복시킨 것입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10,52)

 

신앙은 하느님의 일방적인 은총의 결과도, 맹목적인 순종도 아닙니다. 우리의 바람과 하느님의 바람의 만남입니다. 바로 거기서 신앙이 움터 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바람을 일깨우고자 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다가와 물으십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당신은 어떻게 답하고 싶은가요? 물론 이 바람은 찰나적 원의나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것과는 다른 무엇입니다. 욕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바라는 것들을 내려놓게 되면, 보다 깊은 차원에서 항구하게 솟아나는 바람을 마주하게 됩니다. 바로 그 바람을 찾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자신에게 질문합시다.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여기에서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블롱델의 통찰은 큰 도움이 됩니다. 그에 따르면 모든 인간 활동의 출발점에는 의지의 작용이 있습니다. 블롱델은 이 의지 작용을 연구하며,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 ‘내가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음을 밝혀냈습니다. 스스로가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이 스스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이 바란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비롯되었나요? 우리도 모르는 사이, 타인이 나에게 바라는 것을 내가 바라는 것과 동일시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진정 바라는 것을 찾기 위해서는 타인이 나에게 씌워 놓은 것들을 의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길들여진 것은 아닌지, 내가 진짜로 바란다고 착각한 것은 아닌지. 어쩌면 우리는 한 번도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이 착각에서, 잠에서 깨어나게 할까요.

 

혹자는 이야기할 것입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 살아왔는데, 사실 이 삶이 자신이 진정 바랐던 삶이 아니었다고 말이죠. 그런데 정말 이 삶이 스스로 원하고 선택한 삶이 전혀 아니었다는 말인가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요?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을 묻지 않았던 것이 문제는 아닐까요?

 

신학생 양성의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학생이 찾아와 신학교를 그만두겠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곧바로 결정을 내리지 않고 학생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도록 이끄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가 진정 바라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말이죠. 그리고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자기 자신을 대면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문화가 그렇기 때문에, 혹은 그렇게 양성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진지하게 자문하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이를 인정할 수 있을 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출발점으로 다시 올 필요가 있습니다. 동기를 새롭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하는 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내면의 열망을 다시 발견하고, 진정으로 열망하는 것을 찾아야 합니다.

 

물론 여태껏 살아온 삶을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고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온 삶을 다시 읽고 그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과 해 오던 일의 가치를 부정하기보다는, 가던 길을 멈추고 침묵 중에 내 마음 깊은 곳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삶, 내가 경험한 수많은 일들, 내가 만난 많은 사람들, 그 안에서 행한 나의 경험들, 그리고 생각과 감정들, 그 모든 것 너머에 있는 나의 숨결과 바람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다시 물어봅시다. 나는 정말 무엇을 바라는가?

 


 

사랑,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바르티메오가 진정으로 바랐던 새로운 삶이란 어쩌면 진정한 사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말을 이렇게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다시 사랑하고 싶습니다! 새로 태어나 새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 만물을, 자연을, 찬란한 하늘을, 창공을, 풀과 나무를, 땅을.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을!”

 

예수님께서는 답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르티매오의 문제는 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열망을 찾지 못한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제 너는 그 열망의 상대를 찾아 떠나가거라!” 바르티매오는 이제 진정 바라고, 사랑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길을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이란 한순간에 완성된다기보다는 온 삶에 걸쳐 서서히 무르익는 과정입니다. 우리 역시 진정 바라고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길을 떠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람을 좇는 것이 허무맹랑한 환상을 좇는 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사랑과 우정의 관계로 맺어진 존재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맡겨진 사람들을 거부할 수도,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바라는것이며, 사랑 없이는 바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나에게 맡겨진 사람, 주어진 일을 사랑하는 것은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과 일치할 때 우리는 진정 행복할 것이며, 온 삶이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가브리엘 천사에게 드린 답변처럼 말입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여러분, 함께 묵상해요! 🙏

 

· 마르 10,46-52

· 루카 1,26-38

 

위 구절을 묵상하며 나의 삶을 돌아봅시다. ‘바람이라는 주제로 나의 삶을 새롭게 읽으며, 자신이 진정 바라며 살아온 것이 무엇인지 헤아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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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수원교구 사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이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습니다. 축구와 글쓰기를 즐기며, 교회 쇄신과 시노달리타스 구현, 젊은이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 희망의 신학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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