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베드로이다.”

영성과 신심

“너는 베드로이다.”

레오 14세 교황의 탄생을 맞이하는 자세

2025. 0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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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파 프란치스코. 2014년 한국을 방문하시어 순교자 124명을 시복하신 분. 고통받는 이들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며 주저하지 않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 주신 분. 양 떼 냄새 나는 목자가 되라고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을 격려하셨던 분. 교회는 그 자리에 안주하지 말고 세상의 그늘지고 소외된 곳을 찾아 나서는 야전 병원같아야 한다고 외치셨던 분. 형식주의에 갇힌 순수함이라는 환상에서 벗어나 현장의 진흙을 손에 묻히기를 겁내지 말라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신 분. 이 길을 걸어가다 유혹에 빠지고 자신의 나약함에 걸려 넘어져도 하느님 자비에 대한 희망을 잃지 말고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라 우리를 응원하신 분. 그분은 2025420일 예수 부활 대축일에 모든 신자들과 온 세상을 강복하신 후 다음 날 아침, 그토록 사랑하던 자비로운 아버지 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교회는 슬픔에 잠겼습니다. 사람들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사순시기 동안 육신의 고통을 통해 그리스도의 수난을 참여하셨던 순간을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온몸으로 증거하셨던 부활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교회법에 따라 로마에 모인 추기경들은 매일 정기 회합을 열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장례 절차를 논의했고, 새로운 교황님을 선출할 콘클라베의 진행 방안을 협의했습니다. 추기경들은 전 세계 교회의 상황을 귀 기울여 듣고 식별하면서, 지금 이 순간 성령께서 어떤 목자를 교회에 보내려 하는지 그분의 뜻을 성찰했습니다.

 

202558.

콘클라베가 시작된 지 이틀째.

네 번째 투표를 마친 후,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의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솟아 올랐습니다. 성 베드로 광장은 기쁨의 환호성으로 가득 찼고, 로마 시내 모든 성당의 종들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종소리를 들은 로마의 신자들과 순례객들은 너도나도 성 베드로 광장으로 향했습니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 순간, 저는 광장의 맨 앞줄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새로운 교황님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도미니크 맘베르티 수석 부제 추기경이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발코니에 나와 말했습니다.

 

여러분에게 큰 기쁨을 알립니다. 교황님께서 선출되셨습니다. 거룩한 로마 교회의 로버트 프란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십니다.”

 

프레보스트 추기경의 이름이 불렸을 때 광장에는 잠시 침묵이 감돌았습니다. 수많은 언론에서도 예측하지 못했던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황청 주교부 장관이 되신 지 2년 남짓, 추기경으로 서임되신 지도 2년이 채 되지 않은 분이었습니다. 맘베르티 추기경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그분께서는 레오 14세라고 불리기를 원하셨습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광장은 큰 함성으로 가득 찼습니다. 모두가 쉼 없이 레오를 연호했습니다.

 

레오라는 교황명을 들으면 특별한 교황 두 분이 떠오릅니다. 대大교황으로 불리는 레오 1세 교황과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로 잘 알려진 레오 13세 교황입니다.

레오 1세는 군대의 힘 없이 평화로운 방법으로 두 차례나 이민족들의 침략에서 로마를 지켜냈습니다. 또 칼케돈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교리를 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하셨지요. 다른 교황인 레오 13세는 가톨릭 사회 교리의 시작을 알리는 회칙 〈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를 발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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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교황님은 콘클라베 후 처음으로 전체 추기경단과 만난 자리에서 교황명을 선택하신 이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저는 레오 14세라는 교황명을 선택하였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주된 이유는 레오 13세 교황님께서 〈새로운 사태〉라는 역사적인 회칙을 통해 제1차 산업 혁명의 맥락에서 발생한 사회 문제들에 대응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산업 혁명과 인공 지능의 발달은 인간의 존엄성, 정의, 노동을 수호하는 데 새로운 도전을 던집니다. 교회는 자신이 이어받은 사회 교리의 유산을 모든 이에게 제공하며 이에 응답할 것입니다.”

 

아울러 레오 14세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의 노선을 계승하겠다고 밝히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교황으로 재위하는 동안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으로 몇 가지 주제를 제시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우선적으로 선포할 것

모든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선교적 회심

“(주교단이 함께 결정하는)단체성(collegiality, 〈교회 헌장〉, 22항 참조)과 시노달리타스의 증진

신자들의 신앙 감각에 대한 관심, 특별히 대중 신심에 대한 관심

소외된 이들에 대한 사랑 어린 배려

오늘날 세상과 그 다양한 실재와 나누는 용기 있고 확신에 찬 대화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교황님의 임명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교황님은 교회의 교계 제도라는 피라미드의 가장 위에 계시기에 우리와는 거리가 멀고, 직접적으로 관련 없는 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그래서 일국의 왕이나 왕비를 바라보듯이, 중세 드라마를 보듯이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종과 레오 14세 교황님의 탄생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교황이라는 자리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교황님이 지니는 세 가지 법인격을 간단하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법인격이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권리와 의무가 귀속되는 법률상의 인격이라고 합니다.

교황님의 첫 번째 법인격은 로마의 주교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로마의 첫 주교였으며, 교황님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입니다. 교황님은 로마의 주교로서 다른 모든 주교들과 함께 사도들의 후계자이고, 주교단의 일원이 됩니다. 교황님의 많은 문헌에 주교들을 형제 주교님들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이를 엿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처럼 교회가 단순히 피라미드 형태의 수직 구조가 아니라는 점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교황님은 다른 모든 주교들과 함께 주교이고, 사도들의 후계자인 다른 주교님들과 함께 주교단 안에서 일치하여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를 대리하고, 복음을 선포하며 일치의 상징이 됩니다.

 

교황님의 두 번째 법인격은 보편 교회의 최고 목자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가 열두 사도들 가운데에서 지니는 수위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8-19)

 

교황님은 보편 교회의 최고 목자로서 교황청의 여러 부서들을 통해 이 직무를 수행하십니다. 각 교구의 주교님들을 임명하고, 개별 교구의 범위를 넘어서는 중요한 사안들을 결정하십니다.

하지만 이 권위는 단순히 군림하고 지배하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섬기고 돌보며 사랑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들을 돌보아라.”(요한 21,17)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교황청과 지역 교회의 관계는 단순히 위아래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사회 교리의 중요한 원칙 가운데 하나인 보조성의 원칙에 기반해서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서로 돕고 협력하는 관계입니다.

 

교황님의 세 번째 법인격은 국제법적으로 인정되는 주권 국가인 바티칸시국의 군주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교황님은 사도좌와 외교 관계를 맺은 다양한 나라들에 교황 사절을 파견하시고 외교 무대에서도 복음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평화와 인권 수호를 위한 목소리를 내십니다. 소외되고 억압받는 약자들을 보호하는 일에 국제 사회의 협력과 동참을 호소할 수 있게 됩니다.

 

, 교황님은 우리 교구 주교님의 형님뻘인 큰아버지 같은 분이고, 동시에 전 세계 교회 공동체를 섬기는 종들 가운데 종이며, 가장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국경을 뛰어넘는 연대와 참여를 호소하는 지도자입니다.

 

레오 14세 교황님께서 선출되셨을 때, 언론 매체들과 많은 사람이 궁금해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노선을 계승하실까? 아니면 자신만의 길을 걸으실까? 진보적인 분이실까? 전통주의에 가까운 분이실까? 첫 미국인 출신이시기에 (페루 시민권자이시기도 하십니다만), 미국이 세속 정치에서뿐만 아니라 종교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여기서 잠시, 이런 질문들을 던지는 언론 매체들이 콘클라베 동안 어떤 사람을 교황 후보로 예측했었고, 그 예측의 근거가 무엇이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만큼, 때로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단편적인 정보만 편식하는 세상에서는 교황님이 누구이고 그분의 역할이 무엇인지 올바로 바라보지 못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레오 14세 교황님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후임자이지만,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후계자는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모든 교황은 베드로가 그러했던 것처럼 자신의 모든 결점과 인간적인 나약함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용기 있게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라고 고백하는 분입니다.

콘클라베는 그 자체로 성령께서 온 교회에 보내시는 초대입니다. 레오 14세 교황님께서 교황 재위 기간 동안 걸어가겠다고 밝히신 방향성은, 하느님께서 교회의 지체인 우리 각자에게 던지는 초대입니다. 인공지능 혁명과 산업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소외된 사람들, 새로운 기술의 발달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노인들, 젊은이들, 전쟁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들과 어린이들. 그들과 어떻게 연대하고, 이 시대에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울려 퍼지게 할 것인가? 어떻게 그들 안에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깊이 만날 것인가? 이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선교하는 제자로 거듭날 것인가? 어떻게 내가 속한 공동체, 나의 본당, 우리 교구가 선교적 회심을 이루게 할 것인가? 이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시노달리타스가 우리 교회의 삶에 자리 잡게 할 것인가?

 

어떤 사람들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한국 교회에 남기신 마지막 선물이 2027년 서울 세계청년대회(WYD)에 거의 확실시되는 레오 14세 교황님의 방한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선물은 언제나 구원을 위한 초대이고, 그 초대는 언제나 우리의 응답을 요청합니다. 콘클라베와 새로운 교황님의 탄생을 그저 드라마 한 편 보듯이 즐기고 끝낼지, 아니면 그를 통해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만나고 복음의 기쁨을 살아가는 계기로 삼을지는 이제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하느님, 우리 교황 레오 14세에게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내리시어

언제나 당신 마음에 드는 목자가 되게 하소서.

우리가 그의 목소리에서

유일한 목자이신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를 따르는 착한 양 떼가 되게 하소서.

아멘.

 

 

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로마 라테란대학교 알퐁소대학원 윤리신학을 전공했습니다. 현재 교황청 복음화부에서 활동하며, 그레고리안 대학에 출강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복음을 통해 살아 있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구체적인 삶 안에서 살아 낼 수 있을지 고민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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