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성경 이야기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그가 그분을 만난 뒤로 - 니코데모 이야기(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는 요한 복음서에만 나타나는 고유한 표현으로,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중요함을 미리 알리고 이에 주목해야 함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비록 예수님께서 겉으로는 니코데모의 무지함을 지적하시기도 하나(3,10) 적어도 세 차례나 당신의 중요한 말씀을 전해 주시며 그를 성심껏 가르치려는 열의를 보이신 것이다.

 

니코데모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이미 늙은 사람”(3,4)이라는 표현을 쓴다. 실제로 늙어 버린 자신을 표현한 것일까? 최고 의회 의원이라는 직분을 생각해 봤을 때 충분히 가능성 있다. 하지만 사람은 물리적인 나이가 차지 않아도 충분히 늙을 수 있다. 고지식한 관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변화를 모르고 항상 구태적인 사고에 머물러 있는 사람, 권위와 위압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물리적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늙은 사람이다. 니코데모는 혹시 자신이 최고 의회 의원으로서 이러한 삶에 물들어 있다고 느낀 것일까?

 

그러한 입장에 선 니코데모에게 있어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신비로운 가르침은, 자기가 알던 지식에 새로운 충격을 불어넣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에 정통했던 만큼 모세를 직접 언급하시며 니코데모에게 가르침이 더욱 생생하게 전달되기를 의도하신 것 같다.

 

이 모든 대화는 요한 복음서 321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을 끝으로 별다른 결말 없이 마무리된다. 예수님과 니코데모의 작별 인사는 물론이거니와 니코데모가 이에 어떠한 답변을 했는지, 어떠한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도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이어지는 22절에서 예수님은 바로 제자들과 함께 유다 땅으로 가신다. 이후 7장에서 니코데모는 초막절이 되었을 때(7,2.11.14.37) 다시 등장한다(7,45-52). 성전 경비병들이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명령을 받아 예수님을 잡으러 갔지만 빈손으로 돌아온 상황이다. 성전에 들어온 경비병들이 바리사이들에게 꾸지람을 받자 했던 첫 말은 다음과 같았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이 발언은 동료들과는 달리 니코데모에게는 매우 강력하게 다가왔다. 그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했던 생각을 경비병들이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경비병들을 예수님께 속은 이라고 표현하고, 그분을 따르는 군중을 저주받았다고 표현하는 동료 바리사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요한 7,51)

 

여기에서 나타나는 우리역시 3장에 나타난 우리라는 표현의 연장선이다. 하지만 이 발언은 다분히 의도적인 발언으로, 이미 모두가 공유하는 율법을 근거로 하여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동료들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나름 최대한의 방법으로 예수님을 변호하려고 한 셈이다. 더불어 이 메시지는 바리사이들이 그저 멀리 떨어져 그분에게 손가락질하지 말고 가까이에서 그분의 말씀을 듣게 해 보려는 니코데모의 시도이기도 하다. 자신도 그러한 방식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신비로운 체험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니코데모의 말은 엄연히 신명기에 쓰여 있는 내용을 근거로 한다.

 

또한 그때에 나는 너희의 판관들에게 명령하였다. ‘너희 동족 사이에 문제가 생기면 잘 듣고 의롭게 재판하여라. 동족뿐 아니라 동족과 이방인 사이도 그렇게 하여라.’”(신명 1,16)

 

악의가 있는 증인이 나서서 어떤 사람이 잘못하였다고 증언하면, 그 사건의 두 당사자는 주님 앞에, 사제들과 그때에 직무를 맡은 판관들 앞에 서야 한다. 판관들이 잘 심문한 결과, 그 증인이 거짓 증인이고 자기 동족에 대하여 거짓으로 증언한 것이 드러나면…….”(신명 19,16-18a)

 

율법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님을 직접 모시고 와서 자세히 그분 말씀을 들어야 했다. 다만 분노와 아집에 사로잡혀서 그들은 정작 자기들이 연구하고 삶의 지침으로 삼은 율법의 절차조차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같은 7장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느냐? 그런데도 너희 가운데 율법을 지키는 자가 하나도 없다. 도대체 너희는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요한 7,19)

 

안타깝게도 니코데모의 시도는 철저한 외면을 받고 만다. 니코데모는 어쨌든 예수님을 직접 다시 뵈어 그분의 말씀을 듣고 싶다. 처음에는 그저 표징을 계기로 그분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3,2), 이제는 그분의 말씀을 찾기 시작했다(7,51). 신앙이 조금이나마 성숙해진 것이다. ‘밤에 찾아왔던니코데모 머리 위에는 밝은 태양이 떠 있다.

 

그 후 니코데모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아리마태아 요셉과 함께 그분의 성시에 몰약과 침향을 발라 드리려는 모습으로 나타난다(19,38-42). 이 마지막 등장에서 니코데모의 마음은 오히려 더욱 신비에 싸여 있다. 여기에서 그는 아무런 말 없이 아리마태아 요셉과 예수님의 성시를 아마포로 감싸고, 새 무덤에 모신다. 그는 그토록 많은 몰약과 침향을 어디에서 구했을까? 이 무거운 향료를 가지고 오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차갑게 식은 예수님의 성시에 향유를 바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그분을 무덤에 모신 뒤 어떤 얼굴로 집에 돌아갔을까? 복음서는 이에 대해 우리에게 아무것도 전해 주지 않는다.

 

다만 니코데모가 가져온 몰약과 침향이 백 리트라나 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19,39). 요한 복음서 12장에서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비싼 순 나르드 한 리트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그때 예수님께서는 볼멘소리를 하는 유다 이스카리옷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 여자를 그냥 놔두어라. 그리하여 내 장례 날을 위하여 이 기름을 간직하게 하여라.”(요한 12,7)

 

결과적으로 이 여인에게 주어진 임무가 니코데모를 통해 이루어지는 셈이다. 여기서 다시금 니코데모는 유다 이스카리옷과 반대편에 서고 있다. 양으로 따지면 이보다 백 배나 되는 향유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분명 예수님을 향한 한없는 존경심이 있음을 드러낸다. 밤에서 낮으로, 낮에서 이른 아침으로 니코데모를 이끈 이 존경심은 과연 훗날 니코데모를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로 거듭나게 했을까? 그는 자신의 이름처럼 동료들의 완고함을 극복한 의회의 승리자가 되었을까? 처음 만났을 때의 예수님의 말씀처럼(3,3) 위로부터 다시 태어났을까? 그는 여생에도 계속 어둠에서 빛을 향해 나아갔을까?

Profile
인천교구 사제. 현재 로마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담긴 메시지를 연구하는 것이 제 주된 일이지만, 그것을 넘어 교회 안에는 세속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랑과 배려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능한,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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