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잔인한 거 아니야?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이후로 곤란한 질문을 수없이 받아 왔지만, 이번 질문은 곤란을 넘어 잔인이다. 아무렴, 잔인이고 말고. 작품 속 ‘내가 사랑하는 문장’이 무엇이냐니? 책 한 권을 읽어도 가슴을 두드려대는 문장이 수십 개, 수백 개인데 대체 어떤 걸 소개하라는 건지. 작품을 고르는 것도, 작품 안의 문장을 고르는 것도 이래저래 괴로운 일이었다. 결국에 내 나름의 주제를 잡아 문장을 골랐다. 주제는 ‘배신’!! ‘사랑’하는 문장을 이야기하면서 왜 ‘배신’인가! 이유를 따져 볼 시간은 사치였다. 어떻게든 정하는 게 필요했으니까. 그마저도 차고 넘쳐 ‘이상형 월드컵’마냥 하나씩 빼내며 겨우 문장 몇 개를 골랐다. 하지만 여전히 내 옆에는 날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문장이 쌓여 있다. 눈이 마주치면 다시 마음이 흔들릴까 봐 차마 고개를 돌리지 못하겠다.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었어. 흑.
첫 번째 배신: 이토록 솔직한
신은 죽여도 죽여도 가장 큰 문젯거리로 되살아난다. 사생결단 죽이고 또 죽여 골백번 고쳐 죽여도 아직 다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최대의 극치인 살의(殺意), 나의 살의를 위해서라도 당신은 있어야 돼. 암 있어야 하구말구.
《한 말씀만 하소서》 中 / 박완서 (솔. 1판 4쇄. 26쪽) |
‘솔직함’에 배신당한 적이 있다. 첫 기억이 아주 강렬해서 그 이후로도 한동안은 솔직함을 두려워했다. 초등학교 때였다. 늘 함께 붙어 다니던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 계절이 여름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날, 우리 셋은 빈 교실에 남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아직 남아 있던 여린 봄기운이 우리의 봄 같은 마음을 붙들었는지, 다가오는 여름이 우리를 재촉했는지 우리는 비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른 두 명의 친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당시에 아픔이라 여겼던 가족과의 일을 이야기했다. 비밀을 털어놓으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친구들도 나를 위로해 주었고 같이 아파해 줬다고 여겼다. 그런데 며칠 후, 나의 비밀은 반 아이들이 다 아는 이야기가 되었고, 심지어 각자의 엄마에게 전달되어 우리 엄마 귀에도 들어갔다. 속상해하는 엄마의 얼굴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느낀 엄마의 착잡함 그 몇 배로 나는 친구들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비밀이라고 했잖아. 난 비밀을 지켰는데 왜?” 나의 원망은 친구들의 “미안해.” 세 글자로 지워지지 않았다. 복수하자는 마음으로 친구들의 비밀도 이야기하려 했을 때는 나의 비밀에 비해 친구들의 비밀이 별것 아니라는 걸 깨달았을 뿐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깨달음. ‘솔직한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사고로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통곡 대신’ 쓴 이 글을 처음 읽었을 때, 내 몸은 안과 밖으로 저릿했다. 저릿함의 원인은 공감이나 연민이 아니었다. 부끄러움이었고 부러움이었다. 그때까지도 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솔직함에게 당한 배신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문장은 그건 나의 오해라는 걸 깨닫게 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솔직했기 때문에 겪은 상처가 아니었다. 솔직함을 받아들인 이의 잘못이었고 그럼에도 솔직하느냐 아니냐는 나의 몫이었다. 이 깨달음은 그 사건 이후, 솔직함을 숨기고 살아온 내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 되었다. 거기에 솔직함으로 나를 대해 온 수많은 이들에게 느끼는 부끄러움까지 더해졌다. 그렇기에 부러웠다. 박완서 작가님이 서두에서 밝혔듯이 ‘훗날 활자가 될 것을 염두에 두거나 누가 읽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 같은 것’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토록 솔직할 수 있었다는 건 인정하지만, 그 솔직함을 꺼내 놓은 건 작가님의 용기였다. 덕분에 아픔을 꺼내 놓았던 어린 나에게 ‘넌 잘못하지 않았다고, 너의 잘못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문장은 나에게 그럼에도 솔직해야 한다는 깨달음이었고 앞으로의 솔직함에 대한 응원이었다. ‘솔직한 건 용감한 일이다.’
두 번째 배신: 삶으로 완성해야 할
헤식어가는 햇발이 긴 그림자를 끌고 양지를 찾는다.
《나는 혼자서 알아낸다》 中 초동(初冬)의 서정(抒情) / 구상 (시인생각. 1판 1쇄. 94쪽) |
교과서에 실린 시뿐 아니라 시를 찾아 읽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무렵이었다. 찾다 보니, 우리말 표현의 정수라고 해도 좋을 아름다운 시가 참 많았다. 그중에는 곱씹고 곱씹어도 밤하늘에 걸린 초승달처럼 마음에 걸려 떠나지 않는 시가 있었다. 그 수가 점점 많아지면서 좋아하는 시인도 생겼다. 어린 시절부터 작가를 꿈꿨으므로 닮고 싶은 마음도 커졌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좋아하고 닮고 싶었던 몇몇 시인의 가치관과 그가 행한 일을 알게 되었다. 시로만 만나던 시인이 한 인간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살고 있는지 알게 된 것이다. 배신감을 느꼈다. 그때까지 아름다운 생각을 하고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에게서만 아름다운 문장이 나올 수 있다고 믿었던 나의 순수함을 비웃는 삶이었다. 친일을 일삼으며 자신은 나서지도 않을 죽음의 길에 우리나라 청년들을 몰아넣고 앞장서는 삶. 독재 정권을 옹호하고 그에 빌붙어 이익을 얻어 내는 삶.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혐오스러울 만치 뻔뻔하게 여성을 희롱하는 삶. 그야말로 인간이길 포기했다고 할 수 있는 삶이었다. 믿을 수 없었다. 어쩌자고 이런 인간들에게 그런 재능을 주시어 시를 모욕하는지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동시에 내가 이런 인간의 시에 밑줄을 긋고 입으로 소리 내며 가슴에 심었다니,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시를 보는 안목이 없는 건지, 스스로를 의심하기에 이르렀고 이를 부정하기 위해 합리화할 방법을 애써 찾았다. ‘시인을 시로 보면 되는 거지, 작가를 작품으로 보면 되는 거지, 그 삶까지 염두에 둘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일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그리 다짐해도 내 마음은 그게 아니라고 말했다. ‘시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 시를 쓴 이가 아름답지 못하다면 그 시는 거짓이다. 작가는 문장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삶으로 그 문장을 책임지고 완성시킬 의무가 있다. 문장을 거짓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다행히 구상 시인이 있었다. 특히, 소개한 구절은 표현으로도 아름답고, 떠오르는 이미지로도 아름답고 담고 있는 의미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을 책임지는 시인의 삶이 있었다.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를 살아 낸다는 건 ‘긴 그림자’를 끌고 가는 일이라 못내 힘들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양지’를 찾아 나선 삶이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정의를 갈망하는 의지의 시였다.
자신의 것을 아껴 힘든 동료와 소외된 이웃을 도우며 살던 삶을 생각하면 이 시는 응원의 시가 된다. 시린 겨울이 오고 희망이 헤식어가도 반드시 양지는 있으니 찾아보자는 응원 말이다.
햇살과 그림자를 각각의 삶으로 본다면 우리는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진리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삶이 헤식어가도, 아직 햇살을 간직한 누군가가 이미 그림자가 되어 버린 누군가를 놓지 말아야 한다는 진리, 양지로 향하는 길에 꼭 그들을 끌고 함께 가야 한다는 사랑.
그러므로 이 문장을 소리 내어 보며 나는 다시 다짐하는 것이다. 내가 쓴 문장은 비록 비루하지만 이마저라도 지킬 수 있는 삶을 살겠노라 하고.
주제를 ‘배신’으로 잡고 문장을 뽑은 줄 알았는데 글을 쓰고 보니 ‘진실하고 솔직함’이 주제였던 게 아닌가 싶다. 역시 ‘글’은 어둠보다는 빛을 향해 가는 ‘길’이 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