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조용히 묵상해 봅시다.
|
나는 왜 여기 있는 걸까?
부활 제4주일은 ‘성소 주일’로 잘 알려져 있다. 교회는 성소 주일을 지내며 좁은 의미로 사제와 수도 성소를 부각하지만, 보편적인 성소에 대해서도 초대한다. 그리스도교의 모든 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복음적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는지 함께 묵상하며, 그 부르심을 새롭게 하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는 인간을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했다. 사실 ‘정신을 차려 보니 내가 살고 있더라.’라고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렇게 세상에 던져진 것이 우리의 처지라면 던진 분의 뜻이 나의 성소가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원하시길래 나를 세상에 던져 놓으셨을까?
“나는 문이다.” 닫힌 하늘을 여는 한 문장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문’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0,7 참조). 문이 대체 어떤 의미를 갖길래 당신을 그렇게 표현하셨을까? 문이 없으면 각각의 공간은 고립된다. 문을 통해 이 공간과 저 공간이 연결된다. 그리고 문은 양쪽 공간을 동시에 대면한다.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예수님께서 당신을 문이라고 말씀하셨으므로 그분께서는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는 문이 되신다. 예수님을 통해 하늘이 땅으로 열리고, 땅은 하늘로 향할 수 있다. 또한 하늘과 땅이 합쳐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 없으시다면 하늘이 막혀 있는 채 우리는 땅에 존재할 것이다. 막혀 있는 하늘은 땅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또한 예수님께서 문이시므로 이 두 공간, 하늘과 땅을 동시에 대면하신다. 즉, 하늘과 땅을 모두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하느님과 인간으로 바꾸어 말해도 오류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신 분으로, 사람이 되어 오신 하느님, 즉 ‘메시아’시라는 것이다.
열린 문, 이어진 삶: 우리는 하늘과 연결되어 있다
문이신 예수님 덕분에 땅에서 살아야 하는 우리가 땅에 매몰되지 않고 하늘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목소리가 감히 하늘에까지 가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를 바치고 있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와 하늘이 연결되는 것이다.
반대로 문이 닫혀 있으면 그 문은 벽과 다를 게 없다. 문이 열려야 비로소 두 공간이 연결되는데, 그때 문은 두 공간을 이어 줄 뿐이지 문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착한 목자’를 알고 있다는 것
오늘 제2독서를 통해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전한다.
“예수님께서는 모욕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십니다.”(1베드 2,23)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알린다.
“전에는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었지만, 이제는 영혼의 목자이시며 보호자이신 예수님께 돌아왔습니다.”(1베드 2,25)
이렇게 당신의 양들을 위해서는 어떤 일도 하시면서도, 당신을 위해서는 어떤 요구도 하지 않으시는 ‘착한 목자’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이런 착한 목자를 알고 있는 한 우리는 더 이상 길 잃은 양이 아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9-10)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성소를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길을 잃지도, 땅에 갇히지도 않을 것이다.
‘부활의 빛’ 속에서 다시 듣는 ‘부르심’
우리는 부활 제4주일, 부활 시기의 한 중간을 보내고 있다. 당신의 성소를 한껏 살아 내신 예수님의 행적과 가르침은 죽음으로 종결되지 않았다. 부활의 빛으로 비추어져 새로운 의미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분께서 당신의 성소에 따라 나누셨던 사랑, 세우고자 하셨던 정의, 선포하셨던 하느님 나라는 결코 헛되거나 실패하지 않았다. 우리 역시 사랑을 갈망하고 정의를 추구하며 하느님 나라를 희망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부르심이지 않을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 그 문을 활짝 열어젖혀 우리에게 하늘을 보여 주시면서 우리가 하늘을 희망하게 하신다. 그 ‘착한 목자의 부르심’에 “네!” 하고 기꺼이 응답하며 따라가자.
🔗 함께 읽으면 더 좋은 아티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