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에 대한 질문

신학 칼럼

구원에 대한 질문

<구원에 대한 신학적 개념> 4화

2024.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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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은 여러 세대에 걸쳐 다양한 범주를 제안하며 구원을 이해해 왔습니다. 이 글에서는 현대인에게 여전히 중요한 고전적 이미지를 아우르며 구원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고자 합니다.

 

| 앙헬 코르도비야 페레스Ángel Cordovilla Pérez (교황청립 코미야스 대학교)


구원에 대한 신학은 역사적으로 질문을 통해 등장하고 발전해 왔습니다. 가장 잘 알려진 고전적인 질문은 11세기 베네딕도회 수도사 캔터베리의 안셀모가 던진 하느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그전에도 제기된 적이 있지만 구원을 이해하는 명시적이고 체계적인 방법의 구원론 역사는 안셀모와 함께 시작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구원에 대한 질문은 다양한 방식으로 형성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 복음에는 구원에 대한 여러 질문이 등장합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구원을 삶과 죽음의 문제로 고민하던 율법 학자가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루카 13,23)라고 예수님께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2, 3세기에는 그리스도는 왜 그렇게 늦게 오셨는가라는 질문이 등장하며 그리스도의 보편성과 중재의 문제를 생각했습니다.

 

4세기 초기 교부들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놀라운 사실에 직면하고 그리스도는 왜 그토록 큰 대가를 치러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질문은 11세기에 강생의 이유에 대한 고전적 질문으로 이어졌지만 예전과 다른 새로운 관점의 질문이었습니다. 20세기에는 두 차례의 큰 전쟁의 비극, 쇼아(홀로코스트), 전 세계인의 대다수를 노예로 전락시킨 구조적 불의 앞에 세상은 공포에 사로잡혔고 근본적으로 해방되지 않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느님과 구원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구원을 더 강력한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지 묻게 만드는 유한성과 필멸성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오늘날 구원론의 고전적인 질문은 시사성을 잃은 것처럼 여겨집니다. 최소한 종교적 관점에서 볼 때 현대인은 구원에 대한 필요성을 곧바로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언어에 관심을 기울이면 삶과 피조물에게는 확고한 안전함과 충만한 기쁨이자 궁극적인 의미와 운명의 완성으로 이해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나 질문이 사라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더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구원에 대한 질문은 하느님은 왜 인간이 되셨는가가 아니라 인간은 왜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인간은 왜 하느님으로 남기를 원하는가? 왜 하느님이 되려고 하는가? 무엇보다 왜 하느님처럼 살기를 열망하는가? 이 질문들을 다시 생각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교의 핵심 메시지와 일치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신성한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자유롭게 외부와 소통하기로 결정하셨고, 자기 소통에 대한 하느님의 본래 의지로 인간이 소통의 대상이자 수신자로 등장했습니다. 신학의 관점에서 인간이 무엇인지는 하느님의 본래 계획(하느님 자신을 내어주심)과 인간 창조의 궁극적인 운명(신성한 친교), 즉 근본적인 시초론(하느님 안에서 시작)과 궁극적인 종말론(하느님 안에 있을 운명)에서 결정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본래 계획과 인간의 궁극적인 운명 사이에 일어나는 일을 흔히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 , 나약함, 죽음을 확고히 극복하는 영광, 충만함, 영생 속에서 하느님의 생명과 나누는 친교에 이르지 못하는 현실은 구원으로 간주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질문에 신학적으로 답하기 위해서는 밀접하게 연관된 다른 질문에도 답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부르심을 받은 존재로서 충만함에 도달하려면 무엇이 필요하며, 인간은 어디에 속하는가? 자유롭고 과감하게 독립적인 방식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한가? 자신을 억압하는 구조를 파괴하고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공간을 만드는 해방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하는가? 죄와 죽음처럼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옭아매는 힘을 극복할 수 있도록, 무상으로 주어졌지만 진정으로 마음속에 뿌리내린 내면의 힘이 필요한가? 마음속에 자리 잡은 갈망과 희망을 넘치고 놀랍도록 충만하게 해줄 하느님이 필요한가?

 

정답을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인간은 무엇이고, 하느님은 누구신지에 대한 이해에 따라 각자 대답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깨달음, 해방, 구속, 치유, 의화, 신성화, 친교, 회심……. 이 모든 것이 우리가 흔히 구원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합당한 범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의 선물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처한 새로운 상황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1코린 1,30). 하느님, 그리스도, 인간, 존재와 마찬가지로 구원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각 세대는 예전 단계를 대변하는 무의미하고 고루한 방식을 암흑 속에 묻어 두고 하느님과 인간에게 합당하지 않아 단호히 버려야 할 것은 거부하면서 인간, 하느님, 세계에 대한 각자의 이해에 따라 자신의 세계관과 가까운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학은 정당한 질문을 제기하고 얼룩진 이미지를 정화하며 항상 참신한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 문화적 식별이라는 과제에 기여해야 합니다. 이 작업에서 그리스도교는 사람들에게 구원의 종교로 다가가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 글은 스페인 학술지 <Razón y Fe>에서 발췌 및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 원문 출처 ■

Cordovilla Pérez, Ángel. (2023). La concepción teológica de la salvación.

<Razón Y Fe> Vol. 287 Núm. 1461 (2023): Sanación y salvación pp.115-129

https://revistas.comillas.edu/index.php/razonyfe/article/view/19172

https://doi.org/10.14422/ryf.vol287.i1461.y2023.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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