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4년, 지금으로부터 약 240년 전, 광암 이벽의 권유로 동지사 편에 북경에 갔던 이승훈이 그곳에서 예수회원들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과 함께 세례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세례를 베풀고 공동체를 형성했다. 이렇게 평신도에 의한 교회 설립은 교회 역사상 유일무이하다. 우리는 한국 천주교회의 시작을 이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역사 인식을 뒤집는 한 뉴스가 방송되었다. 2016년 6월 ‘금속 활자의 비밀들’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팀과 사단법인 ‘세계종교평화협의회’가 세계종교문화축제 준비를 위한 해외 교류 일정 중에 바티칸 비밀문서고를 방문하였고, 그때 1333년 아비뇽에 머무르던 요한 22세 교황(재위 1316~1334년)이 북경 교구장을 원나라에 파견하면서 고려 왕에게 그리스도교에 대한 협조의 내용을 담아 보낸 라틴어 편지 사본을 발견하였다는 것이다. 이 뉴스는 한국 천주교회의 신자들뿐만 아니라 교회사학자들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그 서한에 따르면 이미 고려 시대 때 로마 가톨릭 교회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있었고, 따라서 한국 천주교회의 기원은 1784년이 아니라 130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의 편지는 북경교구의 몬테 코르비노 요한 대주교(1246~1328년)의 선종 소식을 접한 요한 22세 교황이 1333년 10월 1일에 쓴 네 통의 편지 중 하나다. 교황은 1333년 9월 8일 파리 대학 교수였던 프란치스코회 니콜라우스를 북경의 두 번째 대주교로 임명하면서 몽골인들의 왕 대칸(Magno Cani regi Tartarorum)과 몽골 백성들(populo Tartarorum), 킵차크 칸국의 가자리아의 통치자 우즈베흐 칸(Usbech in Gazaria imperanti)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마지막 편지의 수신인은 다음과 같다.
“Magnifico viro Soco de Chigista Regi Corum, Deum diligere et timere”
(하느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데 뛰어나신 Soco de Chigista Regi Corum)
그런데 ‘금속 활자의 비밀들’이라는 다큐멘터리 보도 뿐만 아니라, 꽤 오래전부터 유럽의 여러 학자들은 “Rex Corum”을 “고려인들의 왕”으로 설명하고, “Soco(Sece) de Chigista”를 고려 27대 왕인 충숙왕(1294~1339년)과 연결시킨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1. 라틴어 문법에서 일반적으로 민족명, 혹은 백성의 이름을 복수 소유 2격으로 쓸 경우, 한국을 나타내는 Corea는 국명, Coreanus는 민족명에서 “한국인들의”라고 표현한다면, “Coreanorum”으로 표기해야 한다.
2. 당시 고려는 유럽인들에게 어떻게 불렸는가. 프란치스코회의 피아노 카르피니(1185~1252년)는 몽골 제국의 수도인 카라코룸(Karakorum)에 다녀온 후 《몽골의 역사》를 썼는데, 몽골 지방의 동쪽에 ‘솔랑기(solangi)’에 대해서 여러 번 언급했다. ‘솔랑기’는 몽골인들이 한반도의 ‘고려’를 지칭하는 것으로 솔롱고스(Solongos), 또는 고올리, 가올리 올스, 코리(Khori), 솔롱고(Solongo), 솔호(Solhho) 등으로도 불렸다. 몽골어로 솔롱고(солонго)는 무지개라는 뜻으로, 고려 왕국의 처녀들이 시집올 때 입은 한복의 무지개 색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또한 베니치아 상인인 마르코 폴로(1254~1324년)도 그의 《동방견문록》에서 고려를 ‘카울리(Cauli)’로 기술한다. 따라서 14세기에 아비뇽 교황청에서 “고려”를 라틴어로 표현했다면, 적어도 “솔랑기” 혹은 “카울리”라고 기술했어야 했다.
3. 요한 22세 교황의 네 통의 편지는 니콜라우스 대주교의 북경 주교 임명 소식과 함께 그와 동료들의 북경까지의 안전한 여행을 보장해 주는 일종의 통행 허가증이고 또한 선교 허가 요청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Rex Corum”에서 “Corum”은 북경 동쪽 멀리에 있는 고려와 연계시킬 것이 아니라, 아비뇽과 북경 사이에 있는 지역의 통치자에게 보낸 것으로 여겨야 한다. 사실 교황의 편지 중 하나는 우즈베크 칸(Özbeg Khan, Uzbek Khan, 1282~1342년), 곧 킵차크 칸국의 제9대 칸(재위 1312~1341년)에게 보낸 것으로, 그는 크림 반도와 흑해 연안의 제노바 공화국의 식민지인 가자리아(Gazaria)를 통치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요한 22세 교황이 우즈베크 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은 “Corum”의 왕에게 보낸 것과 동일한데, 모두 그 지역의 그리스도인에 대한 왕의 환대에 감사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따라서 쿠빌라이 칸이 1260년 몽골의 수도를 카라코룸(Karacorum)에서 오늘날의 베이징(Cambalien, Chambaliec)으로 옮겼고, 몽골 제국을 킵차크 칸국, 일 칸국, 차가타이 칸국, 오고타이 칸국, 그리고 원나라로 나누었다면, 니콜라우스 주교 일행의 선교 여행길은 킵차크 칸국의 가자리아를 거쳐 그 다음의 칸국을 지나가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니콜라우스 주교 일행이 먼저 몽골 여행길에 올랐던 피아노 카르피니의 요한(Giovanni Piano Carpini, 1180?~1252년)과 기욤 드 뤼브르키(Guillaume de Rubrouck, 1215~1270년)의 여정을 따라가지 않고, 당시 비단길을 따라 있는 주요 교역로를 이용하려고 했다면, 일칸국 시대에 역사적으로 중요한 지점 중 하나인 페르시아 지역의 “Qum” 혹은 “Qom”이라는 도시(현: 이란 Ghom/Kum)를 경유했을 수도 있다.
라틴어에서 종종 도시 이름은 -orum을 붙여 그곳 사람들을 뜻하는 복수 소유격 형태로 사용되므로, Rex Qorum 또는 Rex Corum은 “Qum/Qom 주민들의 왕”으로 번역할 수 있다(예: Rex Romanorum, 로마인들의 왕). 그리고 요한 22세 교황이 1318년 일칸국의 새로운 수도인 솔타니예(Soltanijey)에 프랑코 데 페루지오(Franco de Perusio)를 대주교로 임명하며 교구를 설립했고, 북경을 향하는 선교 여정은 솔타니예와 근거리에 있는 “Qum/Qom”을 경유해야 했기 때문이다.
4. “Corum”이 현재 튀르키에의 아나톨리아 흑해 지역에 있는 “Corum”을 가리킬 수 있지만, 니콜라우스 주교 일행이 가자리아 지역을 거쳐 거꾸로 그곳을 경유할 리는 만무하다. 몽골 제국 초기의 수도인 카라코룸(Karacorum)이 한음(漢音) 역어로 합나화림(哈喇和林) 또는 생략하여 화림(和林)이라고 하는데, 중세 라틴어에서 외래 지명이나 새로운 명칭은 반드시 라틴어식 격변화를 따르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형태는 교황청의 외교 문서에서 드물지 않게 나타나므로, “Rex Corum”에서 “Corum”은 카라코룸(Karacorum)의 축약어로 표현될 가능성도 엿볼 수 있다.
5. “Soco de Chigista” 인명과 관련하여, 요한 22세 교황의 편지를 기록한 모스하임(Johann Lorenz von Mosheim)의 중국 교회 역사(Historia Tartatorum Ecclesiastica)에 나와 있는 대로 “Soco”를 “Sece”라고 기록할 경우, 몽골어로 “지혜로운” 또는 “슬기로운”이라는 뜻의 “Setse” 혹은 “Seche(Seze)”로 추측할 수 있으며, 이는 쿠빌라이 칸의 칭호 중 하나였고(Setsen Kahn, 薛禪汗) 몇몇 몽골 귀족들이나 칸국의 지배자들이 자신에게 붙여 부르게 한 칭호였다. 그리고 “Chigista”는 중세 지도책에서도 아무리 찾아봐도 없고, 피아노 카르피니와 뤼브르키의 몽골 제국 기행에도 언급되지 않으며, 현재도 그 지역을 정확히 가늠할 수가 없으므로, ‘n’이 빠진 “Chingista”의 오기로 볼 때, 도시나 지역명이 아니라 “Chingissid”처럼 “칭기즈 칸 가문의 사람들” 또는 “칭기즈 칸의 후손”을 의미하는 라틴어 접미사(~sta)로 추측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Sece de Chigista, Rex Corum”은 1294년에 사망한 쿠빌라이 칸처럼 특정 인물의 명칭이라기보다는, 1330년대에 “카라코룸”이든 “Qum/Qom”이든 그 지역의 왕이며 “칭기즈 칸의 후손인 지혜로운 통치자”로 번역하는 것이 어떤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본다. 요한 22세 교황이 대칸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구체적인 이름을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쿠빌라이 칸의 사망 이후 왕위 쟁탈전을 벌인 혼란스러운 몽골 제국의 역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어쨌든 1333년 요한 22세 교황이 고려인들의 왕에게 서한을 보냈고, 또 그 당시 고려에 자국민으로서 경교이든 가톨릭이든 그리스도교 신자들(christiani indigeni)이 있었다는 사실은 유럽과 국내의 사료 부족으로 아직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어려운 사실이다. 사실 고려 시대 때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한국 사람 어느 누구도 들어본 적도 없다. 국내의 관변측 기록뿐만 아니라 개인의 기록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객관적 사료와 증거가 없이 가정과 유추로 얻은 결론이 역사적 사실일 수는 없다.
1790년 10월 6일,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포교성 장관에게 보낸 편지를 한 번 읽어 보자.
“거룩한 교회가 매우 기뻐할, 대단한 일이 이곳 북경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중국에 속한 만주 지방과 또한 이곳 교구와 인접해 있는 조선 왕국에 복음이 처음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북경에 있던 예수회 관구장 방타봉 신부는 1784년 11월 25일에 이 사실을 본국의 친구에게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아직 어떤 성직자가 안 사람도 발을 들여놓지 못한 한 왕궁에서의 빛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쓰시려고 하신 바의 한 사람이 개종하게 된 이야기는 그대는 위안과 즐거움으로써 들으시리라 믿는다. 그 왕국은 중국 동족에 있는 반도의 나라인 조선이다.”
그리고 1811년 신미년 조선 신자들은 이렇게 교황에게 서한을 보냈다.
“처음에는 책을 통하여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而初以書籍開敎)
이 말은 한역 서학서, 곧 교리서를 읽고서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교회를 설립했다는 말이고, 또 이 말은 초기 조선 신자들이 고려 시대 때 그리스도교 신자들 혹은 교회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으며, 그들과의 연계성도 전혀 없었다는 반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