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8년 5월 31일, 이탈리아 로마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와 경계를 이루는 포도밭 땅의 지붕이 우연히 아래로 무너졌다. 그러면서 그동안 고트족의 침입과 롬바르드족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고, 산사태나 폭풍으로 인해 입구도 모두 흙으로 덮여 그 장소가 어디인지 모호했던 지하 로마(Roma sotterranea)의 “카타콤바(Catacumba)”가 재발견되었다.
이 카타콤바는 본래 로마 제국의 박해 시기(67~312년)에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순수한 매장지, 곧 지하 공동 묘지였다. 주거 지역 안에는 죽은 이를 위한 장지 사용을 금하는 로마법에 따라 로마시 외곽 주요 간선 도로변에 조성된 이 지하 공동묘지는 응회질이 많은 곳에 형성되었다. 이 응회질은 부드러워 맨손으로도 파낼 수 있고, 일단 공기가 닿으면 시간이 흐르면서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지는 특수한 토양이기 때문에, 토양이 공기와 맞닿아 응회암으로 응고되는 과정에서 시체의 썩는 냄새와 썩은 물을 완벽하게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지하 갱도를 따라 수직 벽을 파고 3~5단 층층이 직사각형 혹은 아치형으로 만든 벽 무덤으로 구성된 이 카타콤바는 회화와 조각의 미술품으로 그 내부가 장식되어 있다는 점과 무덤 옆에 놓였거나 그 안에 감추어진 다양한 예술품과 수공예품들로 그리스도교 예술의 요람으로 간주된다.
당시 카타콤바의 관리와 통제는 각 교회 지역의 부제들이 담당했지만, 로마 주교의 책임이었다. 그곳에서 장례식이 치러졌고, 또한 매년 순교자의 순교일이 천국에서의 탄생일(natalitia)로 기념되며 연미사 등 전례 집회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리키니우스 황제의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더 이상 매장을 목적으로 지하 깊이 무덤을 팔 필요가 없어졌고, 노천에서 매장하는 일이 점점 더 많아졌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에 순교자를 기념하는 전례를 집행하기 위해 카타콤바 주위 지상에 묘지 성당들이 세워졌고, 4세기에 그리스도인들의 매장지는 그 묘지 성당 근처가 되었다.
하지만 다마소 1세 교황 시대(재위 366~384년)에 카타콤바의 무덤들이 누차 훼손되는 일이 생겼다. 순교자를 구원을 위한 보증자이며 대리자로 이해하는, 순교자 공경 신심이 늘어남에 따라 많은 사람이 무분별한 열정으로 순교자 옆에 묻히기를 원했고 순례 행렬도 증가했기 때문이다. 순교자들의 무덤 주변 방과 입구에 신자들이 새겨진 수백 개의 낙서, 예를 들어 “내(방문자의 이름)가 여기에 있었다”, 또는 순교자들을 향한 청원과 축복을 바라는 낙서 또한 이에 대한 증거이다.
그런데 카타콤바의 훼손은 결정적으로 고트족에 의한 것이었다. 그들은 로마에 침입한 후 카타콤바 근처에 야영지를 세우며 많은 카타콤바를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따라서 다마소 교황은 카타콤바에 있는 순교자들의 무덤을 재건축하였는데, 무덤 벽을 대리석으로 붙이고 바닥 공사, 채광 공사도 하였으며, 우물, 장례식 참석자들을 위한 좌석과 작은 식탁 등도 갖췄고, 무너져 가는 벽들에 버팀목을 대려고 애썼으며, 새로운 계단 시설을 만들어 순교자들의 묘지에 신자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였다.
특별히 다마소 1세 교황이 순교자들의 무덤을 재장식하며 만든 것은 순교자들을 위한 비문(Epigrammata Damasiana)이었다. 이 비문의 본문은 직접 다마소 교황이 작성하였으며, 당시 서예가이며 석재 조각가였던 푸리우스 디오니시우스 필로칼루스(Furius Dionysius Filocalus)에 의해 독특하고 아주 우아한 서체로 새겨졌다. 그가 만든 비문으로 확인되는 59개의 비문 중 일부는 원본으로 아직도 남아 있고, 일부는 필사본으로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다.* 이 비문은 라틴어 대문자로 쓰여 있고 단어마다 띄어쓰기 없이 붙어 있기 때문에 라틴어에 대한 지식 없이는 해독이 불가능하며, 고대 라틴어 V자는 후대에 계발된 U자로 인식하고 해석해야 한다.
* 황치헌, “교황 다마소 1세(재위 366~384년)의 카타콤바 비문 연구”, 《이성과 신앙》, 제75호, 2023년, 271~362. 이 논문에는 라틴어로 된 교황 다마소 비문들이 모두 번역되어 있다.
<성 에우티키오 비문>
[번역] 순교자 에우티키오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폭군의 잔인한 명령을 물리칠 수 있으며, 당시에 수천 가지 해를 끼쳤던 사형 집행자들의 수단도 물리칠 수 있음을 보여주었네. 지하 감옥의 더러움 뒤에는 육체에 새로운 고통이 따랐고, 파편 조각들은 잠을 자지 못하게 준비되었네. 6일이 두 번이나 지났는데도 그는 음식을 거부당했네. 그는 구덩이 안에 던져졌고, [그의] 거룩한 피는 무시무시한 죽음의 힘이 입힌 모든 상처를 씻기네. 잠드는 밤에 환상이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네. 무고한 사람의 은신처는 그 안에 어떤 지체가 들어 있는지를 보여주네. 그는 찾아졌고 발견되었으며 공경받고 있으며, 모든 것을 보살피시고 보증해 주시네. 다마소는 [그의] 공로를 표하며, [그대는] 이 무덤을 공경하시게.
필로칼루스 서체 외에도 다마소 교황이 직접 만든 비문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은 비문에 직접 그의 이름이 나온다는 점, 그리고 여러 비문 내용 중에 똑같은 단어 혹은 문장이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점이다. 그런데 반복되어 나오는 단어에서 주목할 만한 단어 중 하나는 교황의 명칭이다. 다마소 교황은 자신을 포함해서 일반적으로 주교를 episcopus라고 칭하지만, 그 밖에도 자신을 사제(sacerdos), 그리스도의 주교(antistes Christi), 지도자(rector), 교황(papa), 그리고 하느님의 종(servus Dei)이라 일컫는다. 로마 주교가 자신을 “하느님의 종”이라고 부른 것은 다마소 교황이 처음으로, 교회의 지도자로서 하느님께 봉사하고 있다는 점을 나타내는 것이다.
다마소 교황은 순교자(martyr)를 승리자(victor)에 비유하고, 순교자의 승리의 상징인 종려가지(palma)와 면류관(corona)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또한 그는 순교자들의 무덤에는 이들의 시신과 시신을 태운 재, 뼈만 있지만 순교자들의 영혼은 하늘나라에 거처한다고 기술하며, 육과 영혼의 이분법적 인간관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순교자들에게 하늘나라가 열려 있다는 것, 그곳은 영원한 거처이며 신앙 깊은 이들의 나라라는 것을 강조한다.
특히 다마소 교황은 사투르니노 성인과 헤르메스 성인처럼, 로마 시민이 아닌 순교자들이 로마에 와서 자신의 피로 신앙을 증거한 이들은 “조국과 이름과 태생을 바꾸었다(sanguine mutavit patriam nomenque genusque).”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순교에 대한 보상으로 로마 시민권을 받는다고 역설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조국의 변화를 통해 그리스도[나라]의 주민, 천국의 거주자와 연결시킨다.
또한 그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도 동방에서 일생을 보냈지만, 그들이 로마에서 순교함으로써 로마는 그들을 로마 시민으로 주장할 자격이 있음을 말한다. 마찬가지로 다마소 교황은 펠리치시모 성인과 아가피토 성인 비문에서처럼, 로마가 많은 순교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로마가 누리는 특별하고 비교할 수 없는 영광으로 다른 모든 그리스도교 도시보다 뛰어남을 드러낸다.
또한 비문에서 자주 발견되는 문장이 있다. 로마 황제들이 교회를 박해하는 상황을 다마소 교황은 “칼이 어머니의 거룩한 심장을 찔렀을 때에(Tempore quo gladius secuit pia viscera matris)”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어머니(mater)는 교회를 상징하는데, 교부들의 신학에서 교회를 어머니로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것은 197년경 테르툴리아노가 쓴 《순교자들에게(Ad Martyres)》라는 저서에서 처음으로 발견된다. 이렇듯 다마소 교황은 교부들의 전통에 따라 교회를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키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어머니로 알고 있었으며, 그 어머니인 교회가 황제들로부터 박해받고 있다는 것을 어머니의 거룩한 심장이 찔린다고 표현했다.
다마소 교황은 특히 성인들의 묘소를 “Limina sanctorum”으로 표현하는데, 이는 후에 사도들의 묘소(Limina Apostolorum)라는 말로 발전했으며, 전 세계 주교들이 교황을 정기적으로 방문할 때,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묘소를 방문한다는 뜻으로 사용된다(Visitatio Liminum Apostolorum[=Ad Limina]).
다마소 교황 이후에도 많은 교황, 곧 심마코(재위 498~514년), 비질리오(재위 537~555년), 요한 3세(재위 561-574년) 교황에 의해 역사적인 카타콤바 묘지를 보존하기 위한 복구 작업이 실행되었다. 그러나 8세기와 9세기에 랑고바르드족의 움직임이 로마의 주변 지역을 다시 불안하게 만들었을 때, 바오로 1세(재위 757~767년), 파스칼 1세(재위 817~824년), 세르지오 2세(재위 844~847년), 레오 4세(재위 847~855년) 교황은 순교자 유해 대부분을 교외에 있었던 묘지에서 도시의 대성당으로 점차 옮겼다. 마지막으로 카타콤바 복구 작업을 실행한 이는 니콜라오 1세(재위 858~867년) 교황이었다.
이후 고트족의 침입과 롬바르드족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고 산사태나 폭풍으로 인해 입구도 모두 흙으로 덮여 그 장소가 어디인지 모호했던 지하 로마의 카타콤바는 위에서 언급했듯 1578년 5월 31일 우연히 땅이 꺼지며 다시 발견되었고, 이후 카타콤바의 발굴 작업과 연구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기념하고자 하는 다마소 교황의 열성은 우연한 기회에 발견된 그가 만든 비문을 통해 다시금 세상에 알려졌다. “글이 역사를 말해 주듯”, 그의 비문은 기록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다마소 교황이 로마를 많은 순교자를 가지고 있는 도시로 자랑하는 것처럼, 한국천주교회도 아시아의 다른 나라의 교회보다 많은 순교자를 가지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순교자 개개인의 모범적인 삶을 더욱 기억하고 본받으며 지속적으로 순교 성지 보존을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