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님은 물과 산소 같은 사람

영성과 신심

교황님은 물과 산소 같은 사람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추모하며

“교황님은 물과 산소 같은 사람이라 생각해.”

“왜?”

“물과 산소는 평소엔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같이 살아가잖아. 근데 그게 없다면, 그 무엇보다도 존재감이 커지게 되니까.”

 

교황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나는 교황님이 정말 없다면 이렇지 않을까 생각했다. 모든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을 때는 당연한 것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다고 느낀다지만, 교황님은 더더욱 그럴 것 같았다.

 

처음에 그분께서 우리 앞에 나타나셨을 때가 눈에 선하다.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정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분의 행적 하나하나는 큰 이슈가 되었고 우리의 마음속에 신선한 충격을 주시기에 충분했다. 순수했던 신학생 시절에 되고 싶었던 사제상, ‘가난한 사제’, ‘검소한 사제’. ‘소탈한 사제’의 모습을 그분은 교황님이 되신 순간부터 한순간도 잃지 않으셨다.

 

“로마에 저녁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시스티나 성당의 굴뚝에서 하얀 연기가 하늘을 향해 피어올랐습니다.”
“먼저 추기경 반지를 빼고, 대신 주머니 속에 있던 주교 서품 때의 반지를 꺼내 끼었습니다. 누군가 새 반지를 주시려 했지만 ‘아니요, 저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또 아름다운 금 십자가를 건네주셨지만 저는 ‘20년간 써 온 주교 서품 때의 알파카 십자가가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죠.”

(프란치스코 교황 자서전 《희망》, 332쪽)

 

소탈하고 검소한 사제의 삶은 신학교 입학시험 때에 단골로 등장하는 정답지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사제 서품을 받은 뒤에는 내 입으로 말했던 그 발언이 부끄러울 정도로 초심을 잃은 내 모습이 보인다. 

 

“양 냄새를 풍기는 참된 목자가 되는 대신, 어떤 이는 골동품 수집에 파묻히고 어떤 이는 최신 유행만 좇아다니는 슬픈 사제가 되어 버립니다.”

(《희망》, 311-312쪽)

 

얼마나 아프게 하는 말씀인지. 반대로 그분은 교황님이 되셨을 때 추기경 반지를 빼고 그 자리에 오히려 더 과거의 주교 반지를 끼셨다. 교회의 가장 큰 책임자가 되셨지만, 그에 따르는 특권을 누리시기보단 처음의 마음을 더욱더 간직하시려는 표징이었을 것이다.

 

소탈하고 검소했던 한 사제의 삶

 

검소하고 또 검소했던 그분은 추기경 시절에도 자가용이 아닌 지하철을 즐겨 타셨다고 한다.

 

“추기경 시절에도 거리를 걸으며 지하철을 타고 다니곤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상하게 여기며 차를 타라고 권했지만, 때때로 현실이 그냥 단순합니다. 그저 걷는 것이 좋았을 뿐이죠.”

(《희망》, 146쪽)

 

사진 © 《희망》.

 

걷기를 좋아하시던 교황님은 어느 순간부터 지팡이를 쥐셨고, 시간이 더 흐르자 휠체어를 타기 시작하셨다. 이윽고 더는 형제 추기경들과 장엄하게 입당하시는 교황님을 볼 수 없게 되었다. 교황님은 따로 마련된 자리에 미리 기다리시며 미사를 집전하셨다. 
걸음은 인간의 심연 깊은 곳에까지 새겨진 본성적 능력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말보다 더 먼저 배우는 것이 걸음마 아니던가. 자신이 더는 걷기조차 힘들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그 답답함은 얼마나 클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쉽게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교황님께서는 더는 걷지 못하게 된 당신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교회는 머리와 가슴으로 다스리는 것이지, 다리의 힘으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

(《희망》, 407쪽)

 

교황님도 사람이시다. 그분이라고 답답함이 없으셨을까? 하지만 당신 몸은 당신 것이 아닌 교회의 것임을 누구보다 깊이 새기셨던 그분이다.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이겨 내신 것 같다. 다리는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들지만, 그분에게는 아직 차가운 머리와 따스한 가슴이 남아 있었고, 이 또한 사랑하는 교회를 위해 소진하려 하셨다.

 

휠체어를 타신 이후로 그분의 건강은 계속해서 화두에 올랐다. 걱정과 불안이 없진 않았으나 이는 당시에는 사실 미미했고 그래도 그분께서는 한동안 우리 곁을 지켜주실 것이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분께서 갑자기 호흡 곤란을 보이시며 입원을 하시는 일이 일어났다.

 

교황님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 입원하셨다. 88세의 연세에 폐 문제로 이렇게 한 달 이상 오랫동안 입원해 계신다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징후임이 분명했다. 비록 분심 가운데 바친 무미건조한 기도였지만 매일 그분이 건강을 회복하시기를 청했다.

 

한편으로는 임종이 가까웠다는 느낌을 지울 순 없었지만, 그분이 퇴원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희망을 조금이나마 이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분의 안색은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지신 것이 느껴질 정도로 어두워지셨다.

 

“형, 교황님 퇴원하신 것 보셨어요?”
“응 인섭아, 봤어.”
“안색이 너무 어두워지셨어요.”

“조금은 조심스럽긴 한데, 왠지 준비해야 할 것 같아.”
“왜요?”
“나는 사실 임종하시는 어르신들을 많이 봐 왔거든. 근데 교황님의 눈에서 그분들의 눈이 보였어.”

 

같은 기숙사에 사는 신부님은 수없이 많은 가난한 노인분들의 마지막 곁을 지킨 꽃동네 수사 신부님이셨는데, 교황님의 눈을 보고 그분이 삶의 끝자락에 와 계셨다는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분이 그래도 적어도 몇 달은 우리 곁에 계실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분은 오늘만 해도 각국 정상들을 만나는 일정을 소화하셨지 않은가. 마지막 순간을 앞두신 분이 그러실 수가 있을까? 이 모든 예상은 거짓말같이 빗나갔다. 그 신부님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그렇게 그분의 임종 소식은 긴 파스카 성삼일 전례 여정이 끝난 뒤, 아무 걱정 없이 떠났던 엠마오 여행 가운데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소셜 미디어에서 교황님의 사진 옆에 “1936-2025”라는 숫자가 적힌 포스팅이 올라왔다. 같이 여행하고 있던 신부와 이 사진을 보고 “이게 뭐지?” 하는 순간에 직감과 부정, 희망과 허탈이라는 상반되는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진 © 바티칸 뉴스. 

 

늘 쉽고 단순한 언어로 가르쳐 주신 분

 

“저는 늘 이야기합니다. 신앙의 전수는 방언처럼 이루어져야 한다고요. 학문적이거나 책에서 배운 듯한 어색함이 아닌, 가정에서 일상적으로 나누는 대화처럼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말입니다.”

(《희망》, 109쪽)

 

황님은 평생을 쉽고 단순한 언어로 가르치셨다. 그분이 가르침에는 당신이 실제로 겪은 체험 이야기와, 어린아이도 절로 고개를 끄떡일만한 쉬운 비유가 함께했다. 한때 그분의 일반 알현을 소셜 미디어를 통해 즐겨 보았는데, 그만큼 그분의 가르침이 듣는 이에게 어린 시절의 따스함을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무엇 때문이었을까? 어느 시점부터 나는 그분의 가르침을 즐겨 찾아보지 않았다. 머리가 점점 커지고 나름 학년이 높아지며 어렵고 고상한 것들에 눈을 두기 시작했기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다. 뒤돌아보니 참 부끄럽지만, 온 세상 교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그분의 첫 회칙인 《복음의 기쁨》 이후로 그분이 내신 여러 회칙을 구입한 적이 없다. 뜨문뜨문 그분의 소식을 뉴스로만 접할 뿐, 그 이상 그분의 근황에 처음만큼 깊이 관심을 두지 못했다. 슬프게도 이제는 그분의 그 쉽고도 따스한 가르침을 더 이상 육성으로 들을 수가 없다.

 

그분은 물과 산소 같은 분이었다. 이러한 그분이 막상 우리 곁을 떠났다는 현실이 다가오자, 그분의 빈 자리가 너무나 크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비보 소식에 한동안 아무 말도 잇지 못하였다. 부활 대축일 바로 다음 날이 그분이 세상에서 떠나시는 날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그분이 빨리 세상을 떠나신 것이 막연히 내가 지은 죄로 인한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음날 아시시로 향할 예정이었지만 일정을 취소하고 로마로 돌아가기로 했다.


온전히 소외된 이들과 가난한 이들을 위했던 사람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요, 현실 도피를 위한 달콤한 이야기일 뿐이라 말하는 이들이 있다면, 이 빈민촌에 직접 찾아와 보시길 권합니다.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신앙심과 목자들의 헌신, 주민들의 노력이 만나 이뤄 낸 놀라운 변화를 목격하실 수 있을 테니까요.”

(《희망》, 121쪽)

 

교회의 사제로 서품받으신 이후로 교황님은 당신의 삶을 온전히 약하고 소외된 이들과 가난한 이들, 그리고 어린이들을 위해 소진하셨다.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은 어쩌면 반은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참된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으로 정신을 잃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랑에 미친 사람처럼 만드니까.

 

부활 대축일에 교회와 온 세상에 보내는 축복(urbi et orbi)을 소화하신 것이 그분께서 대중 앞에서 서신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의사들이 교황님께 적어도 두 달은 요양하시며 모든 일정을 취소하시라고 권고하였다는 사실은 며칠이 지난 뒤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아마 그분은 아르헨티나에 계실 때에도, 몸살과 두통으로 고생하실 때도 힘없는 이들과 함께하려고 안간힘을 쓰셨을 것이다. 그분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을 위한 삶을 살지 못하고, 남아 있던 모든 에너지를, 부활을 기념하러 먼 길을 찾아온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소진하셨다.

 

“저는 제 죄들을 기억하고 그것들을 부끄러워합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주님께서는 저를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결코 아무도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희망》, 197쪽)

 

무엇이 그분을 그토록 소진하게 했을까? 당신의 임종을 사흘 앞둔 날, 로마 교도소의 재소자들을 방문할 수 있게 만든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이었을까? 죄인인 나 자신을 항상 어김없이 찾아오시는 예수님, 그분의 모습을 닮고자 하시는 마음이었을 것이라 감히 예상해 본다.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교황님의 서거 소식을 들었을 때, 이때 교황님과 함께 계셨던 제소자들이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시기 3일 전에 나를 찾아오셨다고? 그 몸 상태에서 나 같은 사람을?’ 새 삶을 살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분은 이 세상을 떠나시며 수십 명의 재소자들에게 새 삶을 선물해 주셨다.


교황님께 전대사를 드리기로 마음먹은 순간

 

그분이 선종하신 지 이틀이 지난 수요일이었다. 오전 열한 시부터 일반 조문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언제쯤 그분을 찾아뵙는 것이 좋을지 고민하였다. 

 

나는 첫날에는 사람이 많이 몰릴 것 같으니 그 이후에 찾아뵙기로 하였다. 다니는 학교에서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도서관을 가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사람들이 조문하기 시작하는 날 편하게 도서관에서 앉아 공부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날만큼은 다른 방법으로 그분을 추모하기로 하였다.

 

교황님의 선종 소식으로 슬픔이 가득하지만, 로마는 엄연히 희년 중이라, 이 기간엔 언제든 4대 대성당을 방문하여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그래서 그분께 전대사를 드리기로 마음먹었다. 교황님께서 베풀어 주신 희년의 은사니, 그분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날씨도 많이 더웠고 오전 시간을 다 보내야 했지만 이것이 그분께 드리는 미소한 마지막 선물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마음을 먹었으니 이젠 4대 성당중 어느 곳을 방문하는 것이 좋을지 판단해야 했다. 바티칸 대성당은 당연히 힘들 것 같고, 산타 마리아 마죠레 성당은 교황님께서 당신을 두길 원하신 성당이었으니 사람이 많을 것으로 예상했다. 주교좌 성당인 라테란 대성당도 마찬가지로 바쁠 것 같았다. 그래서 성 밖 바오로 대성당으로 가기로 마음먹고 기차를 탔다.

 

사진 © 이인섭. 
성 밖 바오로 대성당 희년문. 성당을 순례하여 이 문을 지나가면 전대사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된다.

 

사진 © 이인섭.
성 밖 바오로 대성당에는 1대 교황 베드로 사도부터 가장 최근의 프란치스코 교황님까지의 모든 교황님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맨 왼쪽, 기둥 옆에 계신 분이 프란치스코 교황님.

 

예상이 맞았는지 다행히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서둘러 성문을 통과하고 성당 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교황님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현 교황님의 초상화에는 보통 밝은 조명이 비추어져 있었는데, 그 조명이 소등되어 있었다. 그분이 우리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 다시금 실감이 났다.

전대사를 받기 위해 성체 조배, 교황님의 4월 지향 기도, 주모경을 하고 고해성사를 받았다. 

 

“믿지 않겠지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쓸모가 있어. 자, 저기 저 돌을 한 번 봐. 예를 들면……”
“어느 돌요?”
“이거…… 아무 돌이나…… 그래, 이 돌도 무언가의 쓸모가 있지. 이 작은 돌조차도.”
“무슨 쓸모가 있나요?”
“쓸모라……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내가 그걸 안다면, 넌 내가 누구일 것 같아?”
“누군데요?”
“하느님이겠지. 모든 것을 알고 계신 하느님 아버지. 네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죽을지도 아시지.”

(《희망》, 49-50쪽)

 

쓸모없는 돌에 불과하지만, 교황님께서 곧바로 천국을 가실 수만 있다면 이 순간을 위한 도구가 되고 싶었다. 하느님께서 그분의 영혼을 한없는 자비로 받아들이시길 바랐다. 그분이 살아계실 때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대하셨던 것처럼…….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이는 주님의 집을 마치 회원제 클럽처럼 제한하려 하는 이들에게도 중요한 깨달음이 됩니다.”

(《희망》, 346쪽)

 

사제 서품을 받은 뒤 나에게 맡겨진 공동체를, 자격증 있는 사람만 가입하는 회원제 클럽처럼 만들려 하진 않았는지 반성하는 순간이다. 사람이 어떤 실수를 했든, 사제를 미워하든, 사제에게 어떤 잘못을 했든 그는 여전히 교회 안에서 구원받아야 할 영혼이다. 실제로 교회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를 받아들이시면서 시작되었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정의만으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특히 악의 물결을 멈춰야 할 때는 누군가가 자신의 의무를 넘어서는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은총의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죠.”

(《희망》, 93쪽)

 

나는 교황님의 선종 이후로 그분을 애도하면서 눈물을 흘리진 못했지만, 그 눈물은 그분에게 자비를 더 많이 체험한 분들이 대신 흘려줄 거라 믿는다. 교황님은 당신 생애에서 끊임없이 눈물의 은총을 청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지만, 이 비천한 죄인은 아직 그 은총을 청하지도, 받지도 못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교황님의 마지막 모습을 뵈러 바티칸 성당을 찾았다. 며칠 뒤 성지 순례를 오신 어떤 신부님께서, 함께 온 팀의 아이에게 교황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스위스 근위병들이 이를 보자 가까이 다가와서 웃는 얼굴로 그 아이에게 교황님 상본을 선물해 주었다는 이야기는 덤으로.

 

사람은 한평생 살아온 방식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이웃을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이었다. 교황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실 때에도, 누군가가 아이를 번쩍 들어 올리면 그 아이만큼은 지나치지 않으시고 일일이 축복해 주셨다. 근위병도 아마 그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어떻게 설명하시겠어요?”
“설명하지 않을 거예요. 그저 공 하나를 건네주고 놀게 할 뿐이죠.”

(《희망》, 142쪽)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계실 때 그분은 아이들과 공놀이하는 것을 최고의 사목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아이들에게는 어렵고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교리 지식을 주기 이전에, 함께 놀아 주고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 기저에는 아이들에 대한 교황님의 사랑과 관심이 자리 잡고 있었다.


교황님의 장례 미사에 참여하며

 

어느덧 교황님께서 선종하시고 5일이 지났다. 교황님의 장례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새벽 기차에 몸을 실었다. 미사는 오전 열 시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적어도 세 시간 전에는 광장에 도착해야 공동 집전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인파가 그분을 보내드리기 위해 광장에 운집하였다. 지금 세상은 혼란 가운데 있지만, 이날만큼은 각국의 주요 지도자가 그분을 기억하기 위해 한 곳에 모였다.

 

“진정한 일치란 강제된 통합이나,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배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며 하나 되는 것이 일치의 참모습입니다.”

(《희망》, 88쪽)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누구보다도 큰 고통에 계셨던 분이 교황님이셨다. 이 전쟁에서 왜 한쪽 편을 두둔하지 않느냐고 많은 사람이 답답해했지만, 그분의 자서전을 읽은 사람은 그분께서 하신 수많은 일들과 그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교황님을 서방의 군종 신부로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분은 모든 보편 교회의 목자이시기 때문이기에 그러실 수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도자가 그분의 선종 순간만큼은 하나의 메시지를 냈던 이유였다.

 

그분의 삶을 돌아보면, 수많은 어려움과 근심이 그분과 함께했음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분의 교황직 봉사 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각국의 난민 문제를 포함하여, 코로나 팬데믹이 전 세계를 강타하였던 순간에도 한없는 고통을 겪으셨다. 이 팬데믹이 끝나자마자 그 기쁨도 잠시, 세상을 깊은 혼란에 몰아넣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그분의 마지막 순간까지 지속되었다. 우리 같은 신부는 어려움이 있으면 주변에 쉽게 털어놓을 사람이라도 있지만, 그분은 그런 상대조차 찾기 힘드셨을 것이다. 오로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성령께만 마음을 터놓고 말씀드릴 수 있지 않으셨을까.

 

미사가 끝나갈 무렵, 봉사자들이 그분의 소박한 목관을 대중들에게 마지막으로 보이고 성전으로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사람들은 울음이 아닌 환호와 박수 소리로 그분의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모든 사람이 그분이 온전히 하느님 품으로 가셨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장면이었다. 평생 세상의 짐을 짊어지셨으니, 이제는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 쉬시라고, 고생 많으셨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오른손을 흔들며 그분을 배웅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분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분이 이미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을 때에도 그분은 이미 용서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시죠. 그분은 이미 거기 계셨고, 저는 놀라운 마음으로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희망》, 191쪽)

 

이제 교황님은 그분을 기다리고 계시는 예수님의 집으로 들어가셨다. 아직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는 교황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분의 유산을 잘 이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은 오페라처럼 미리 쓰인 대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온전히 몸을 던져야 하는 위대한 모험과도 같습니다. 우리 가슴 속에 열정의 불꽃이 살아 있는 한, 어떤 실패도 우리의 발걸음을 멈출 수 없습니다.”

(《희망》, 298쪽)

 

교회 안에서의 우리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목적지는 분명하니 앞으로 걸을 뿐이다. 때로는 넘어질 수 있고 잘못된 길을 갈 수도 있다. 교황님은 항상 강조하셨다. 그 또한 여정 중에 일부라고. 미천한 사제직을 유지하고 있는 필자 또한 많은 생각을 하며 그분을 보내드렸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영원한 안식 가운데 저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Profile
인천교구 사제. 현재 로마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담긴 메시지를 연구하는 것이 제 주된 일이지만, 그것을 넘어 교회 안에는 세속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랑과 배려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능한,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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