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노년층 신자 수가 나날이 증가하여, 교구에서 노인 사목에 대한 대안과 방향성에 대해 논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교회 소식지와 타 교구 자료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어느 교회 잡지에서 노인 사목을 시작하는 담당 사제와 봉사자들의 이야기를 보았습니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어느 사회복지시설에서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선배 신부님을 찾아가서 나눈 대화 내용이었습니다. 선배 신부님께서는 왜 그들과 함께 생활하시는지 말해 주셨다고 합니다.
“내가 단순히 이 사람들이 불쌍해서 함께 사는 줄 아나? 아니다. 내가 이들과 함께하는 이유는 이 사람들의 복음화를 위해서다.”
[노인사목이야기-복음화의 과제, 월간 〈빛〉, 제384호(2015.4), 참조]
선배 신부님은 확신에 차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이유’를 다른 것도 아닌 ‘복음화’라고 말했습니다. 이 부분에서 후배 신부님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도 이 부분이 매우 깊이 있게 다가와 아직도 자주 떠올리고 있습니다. 그동안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바라보고 만날 때 그저 불쌍하게, 동정하는 마음으로만 바라보았던 지난 시간을 성찰하면서 말이지요. 교회나 사회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떤 마음가짐으로, 어떤 태도로 그들과 함께해야 하는지 배울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그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복음의 정신으로 대하는 신부님 덕분에 그분들은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을 하십니다. 그것은 높은 정상이 아니라, 누구나 모일 수 있는 곳, 차별 없이 원활하게 소통하며 공감할 수 있는 곳, ‘평지’에서 선포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은 행복을 매우 갈망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어려움은 지금 우리의 어려움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그런 어려움을 가끔 겪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런 어려움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가 어서 오기만을 원했습니다. 자신들에게 선포된 복음의 기쁜 소식은 이루어지면 좋고, 안 이루어져도 상관없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간절했습니다. 생존과 삶, 생명과 밀접하게 연결된 하느님을 찾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선포된 말씀을 실현된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고 믿어, 행복하다고 칭송을 받으신” 성모 마리아께 전구를 청하며, 주님께서 선포하신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을 다시 한번 읽고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또 행복한 삶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들려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