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 다가오시는 방법, 우정

영성과 신심

하느님께서 다가오시는 방법, 우정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신 우정의 관계로 초대받았습니다.

2026. 0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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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한민택 신부입니다.

시작 기도로 요한 복음 1513-1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을 실천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가 된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너희에게 모두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영성 생활은 다양한 인간적 매개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중에서도 우정은 특별한 중요성을 지닙니다. 인간적 우정은 동료 간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며, 하느님과의 우정은 경직된 경건주의에서 벗어나 시간이 흐를수록 내적 신뢰가 깊어지는 관계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운 존재, 벌을 내리는 무서운 판관으로만 여기는 신앙은 기쁨과 자유로움이 아니라 경직과 우울함을 낳기 쉽습니다.

 

성경 속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친구처럼 다가오시는 분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 하느님의 말씀’ 2항은 친구처럼 다가오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분명히 전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는 이 계시로써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신다.”

 

구약의 요나서에서는 하느님과 요나의 대화가 친구끼리 나누는 대화처럼 묘사됩니다. 요나는 자신의 예언으로 인해 하느님께서 이방 민족에 재앙을 내리지 않으신 것에 분노합니다. 아주까리 하나로 인해 기분이 상한 요나의 모습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이방 민족에게도 자비와 연민을 지니고 계심을 전하십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0-11)

 


 

모든 만남은 필연적이다

 

인간의 삶에서 우정은 매우 중요한 가치이지만, 한국 문화의 특수성 때문인지 그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내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특히 우정을 동년배 친구들 사이에서만 가능한 관계로 여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나이 차이를 뛰어넘어 맺어진 수많은 우정의 관계가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도, 장모님과 사위 사이에도 우정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모든 우정은 만남에서 출발합니다. 스쳐 지나간 만남이 인연이 되고, 어느새 깊은 우정으로 발전해 보약 같은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성경으로 눈을 돌려보면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떠오릅니다. 제가 프랑스에서 알게 된 조제프 볼렌스키 몬시뇰은 둘의 만남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남이란 내 안의 가장 좋은 것과 네 안의 가장 좋은 것의 만남이다.” 실제로 이들의 만남은 각자의 태중에 간직한 가장 좋고 소중한 존재 사이의 만남이기도 했습니다. 신앙에서 우연한 만남이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싹튼 우정은 관계를 필연으로 만듭니다.

 

한편 우정은 수많은 방문을 통해 깊어집니다. 방문이 없고 연락도 없다면 우정은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성경에도 역사를 바꾼 방문이 등장합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마리아 방문,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 박사들과 목동들의 아기 예수님 방문……. 그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방문은 하느님의 세상 방문일 것입니다.

 


 

사랑과 친교로의 초대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첫 만남을 떠올려 봅시다. 복음서는 제자들의 부르심을 다양한 장면으로 전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만남과 방문을 통해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우정이 자라나고 깊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기 전에 이미 그들을 눈여겨보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요한 복음은 이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48)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우연히 눈에 띄어, 충동적으로 부르셨던 것이 아닙니다. 요한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의 시간까지 기억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요한 1,39)

 

예수님과 제자들의 우정은 수난 전날 저녁 특별한 방식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요한 13,1)

 

곧 이별을 앞둔 제자들 앞에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사랑과 우정을 남기고자 하셨습니다. 마지막 파스카 만찬은 그 징표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당신의 사랑과 열망, 우정과 추억, 그 모든 것을 빵과 포도주에 담아 건네주셨습니다. 그분께서 건네신 빵과 포도주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었습니다. 만찬이 끝난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무릎을 꿇고 발을 씻어 주셨으며, 사랑의 계명을 선물로 남기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2-13)

 

그것은 의무로 지켜야 할 계명이 아니라 아버지와 나누신 사랑과 친교로의 초대였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그 사랑의 계명은 곧 친구 관계로의 초대장이었습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우정의 역사, 교회의 출발점이 되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가장 순수하고 사심 없는 사랑으로 제자들을 친구처럼 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당신 사랑 안에 끝까지 머물기를 바라셨습니다. 물론 제자들은 인간적인 나약함으로 인해 두려움 속에서 그 사랑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그분을 버리고 도망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기억과 추억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다시 돌아와 제자들을 일으켰고, 그들을 새로 태어나게 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이야기는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의 우정을 극적으로 보여 줍니다(루카 24,13-35 참조). 침통한 표정으로 엠마오를 향해 걷던 제자들의 마음을 다시 뜨겁게 만들고, 그들의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돌린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주님과의 동행이었습니다. 함께 길을 걸으며 보여 주신 우정과 사랑은 그분께서 살아생전에 나눠 주신 것과 똑같았습니다. 우정과 사랑의 기억이 그분을 알아보게 했고, 그들의 마음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뵌 뒤 눈이 뜨였고, 그분께서 사라지신 후에도 마음의 눈으로 그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과 함께한 시간을 완전히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기적과 초능력으로 실현되는 나라가 아니라, 제자들과 나눈 우정의 관계 안에서 실현되는 사랑의 다스리심이었습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눈길과 몸짓, 음성, 함께 머무르며 귀 기울여 주신 시간은 그분과 함께한 공동생활과 우정 안에서 하나하나 쌓여 갔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제자들과 나누신 우정은 그들을 부르실 때부터 십자가 위에서 생을 마감하시기까지 이어졌고, 부활하시어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마지막 당부를 남기실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분과 함께한 모든 것은 말씀성사로 남아 새로운 만남과 우정, 새로운 생명을 위한 매개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제자들 가슴 깊이 새겨진 그분에 대한 기억과 추억까지도 말이죠.

 

교회의 성경과 성전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우정을 증언하며 주님의 인격을 교회 안에 현존하게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신앙이 교회로부터 전수되었다는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 것도, 그분을 구세주로 고백하는 것도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교회가 아니었다면, 그분을 기억하며 우정을 전하는 제자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분을 알 수도, 만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우정은 믿음이 전달되는 중요한 인간적 매개체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그 우정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도록 초대받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나누신 우정의 관계로 초대받았습니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당신은 친구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예수님을, 하느님을 친구처럼 친숙하고 가깝게 느끼나요? 무서운 아버지, 무자비한 심판관으로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진정한 친구라면 판단하기보다 들어 주고, 비난하기보다 함께하려 할 것입니다. 그런 친구에게는 마음속 깊은 고민까지 털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하느님을 진정한 친구처럼 여기고 있나요? 가령 고해성사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임하나요? 친구를 만나러 가는 설레는 마음, 혼날까 봐 움츠러든 마음 중 무엇인가요?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 돌아봅시다. 언제 그분을 처음 알게 되었나요? 그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분께 얼마나 나 자신을 내어 드리고 있나요? 주님과의 우정은 우리의 지난 삶 굽이마다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주님과 우정을 나눈다는 것은 그분과 함께 걸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함께 나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루카 24,15)

 

그러고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루카 24,17)

무슨 일이냐?”(루카 24,19)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이야기보따리를 풀어헤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스스로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꺼내 놓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엠마오 제자가 되어 그분과 함께 걸어 봅시다. 우리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시며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혼자 길을 가시려는 예수님을 붙잡고 함께 집에 들어가기를 청할 만큼 깊어졌던 제자들의 정을, 그분께 내어 드린 호의와 친절을 떠올려 봅시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던 주님의 손길을, 그 순간 제자들을 바라보시던 그분의 그윽한 눈길을 느껴 봅시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사랑과 신뢰의 눈길이 느껴지나요? 지금, 우리를 지지하고 결코 저버리지 않으실 우정 어린 눈길을 느낄 수 있나요?

 

우리의 힘겨움은 어쩌면 그 신뢰의 눈길을 외면할 때 찾아오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자비와 신뢰의 눈길을 더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학 시절 영성 지도 신부님께서 늘 해 주시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눈에 늘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부끄러운 죄를 지은 존재라 할지라도 그분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우리를 가여워하십니다.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도록, 자녀의 품위를 되찾도록, 짐을 내려놓고 속 시원히 숨을 쉬도록 말입니다.

 


 

여러분, 함께 묵상해요! 🙏

 

·요한 151-17

·루카 2413-35

 

위 구절을 묵상하며 주님과의 관계를 돌아봅니다. 그리고 주변과 맺은 우정을 돌아보며 삶, 신앙생활, 개인의 삶에서 우정이 지닌 소중함을 다시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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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수원교구 사제. 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이자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신앙교리위원회 총무를 맡고 있습니다. 축구와 글쓰기를 즐기며, 교회 쇄신과 시노달리타스 구현, 젊은이에게 신앙을 전하는 일, 희망의 신학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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