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월 25일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폐막 20주년을 맞이하여 세계주교대의원회, 곧 세계주교시노드의 임시 총회를 소집하셨습니다. 이 회의는 공의회 이후, 교회 안에 어떠한 쇄신과 변화가 이루어졌는지 살펴보고, 다시금 공의회의 은총과 영적 결실을 기리며, 교회의 가르침을 더욱 충실히 연구하고 교회의 실천에 적용하기 위해 마련된 회의입니다.
이 회의에 참석했던 주교님들께서는 최종 보고서에서 전 세계 모든 가톨릭 교회의 통일된 교리서가 편찬되기를 희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신앙과 도덕에 관한 모든 가톨릭 교리를 망라하는 교리서나 그 개요서가 편찬되어야 합니다. 이는 여러 지역에서 작성될 교리서나 개요서의 준거가 될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 교회는 지역 교회나 몇몇 유명한 교리 교육 신학자들이 만든 개별적인 교리서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보편 교회의 교리서도 있었지만, 이는 거의 400년 전에 편찬된 〈로마 교리서〉(1566)뿐이었습니다. 이 교리서는 종교개혁이 있던 시기, 가톨릭 교회의 쇄신과 전통의 수호를 위해 열렸던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결정된 주요한 교리들을 모아 사목자들이 신자들을 올바르게 가르칠 수 있도록 만든 교리서였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각 지역의 주교님들께서는 현대 사회에 부합하는 공통된 교회의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건의하였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 건의가 교회의 실제적인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라 여기며 이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나중에 베네딕토 16세라는 이름으로 교황이 되신 라칭거J. Ratzinger 추기경을 비롯하여 열두 명의 추기경과 주교님들로 구성된 ‘교리서 위원회’가 발족하였습니다. 그들의 열정적인 연구와 노력 끝에 공의회 폐막 30주년이 되는 1992년 10월 11일, 전 세계 모든 가톨릭 신자가 공통된 믿음으로 고백해야 할 내용을 담은 《가톨릭 교회 교리서》가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토록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전 세계 모든 가톨릭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있어 준거가 되는 《가톨릭 교회 교리서》의 첫 부분은 다음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한 17,3)
교리서가 이 말씀으로 시작하는 것은 이 말씀이 전체 교리 내용을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기 때문이겠지요. 지난 글에서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이신 계시 사건의 의미를 살펴보면서, 하느님께서 죄와 죽음에 그늘 밑에 남겨진 인간을 다시금 당신의 본성인 영원한 생명에 참여케 하는 구원을 이루셨고, 이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마련된 선물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앞서 인용된 성경 말씀을 살펴보면, 하느님께서 교회를 통해 우리에게 베푸시는 신앙의 목적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며, 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바로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됩니다. 달리 표현한다면 신앙은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비롯되고, 이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을 ‘안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최고 신학자 가운데 한 분이신 아우구스티노(354-430) 성인이 설명하는 ‘신앙 행위’에 대하여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성인께서는 자신의 책 《요한 복음 강해》에서 “여러분은 그분(그리스도)을 믿는 것이지, 그분의 존재에 대해 믿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분을 믿는다면, 여러분은 그분의 존재에 대해서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의 존재에 대해 믿는다고 해서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악마들도 그분의 존재에 대해서 믿지만 그분을 믿지는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곧 그분께 대한 신앙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에 대한 ‘앎’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이 ‘앎’은 단순히 예수라는 분이 나자렛 출신이고 나중에 갈릴래아를 중심으로 제자들을 모으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을 전하셨으며, 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치유하시고, 죄에 짓눌려 있는 이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악마에 사로잡힌 이들을 해방시키는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다는 ‘객관적 사실’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말씀처럼, 성경에서는 악마도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분을 만나, 그분과 친교를 이루어 그분과 친밀한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실존적 앎’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시기 위해 이 세상에 보내신 예수님은 어떠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만나시고 대화를 나누시는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대상은 이러저러한 사물 또는 객관적인 개념이나 사상이 아닙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이 표현하듯,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과 사귀시며, 당신과 친교를 이루도록 인간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시는” 사랑과 자비의 아버지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하여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하게 드러났습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항)
그러므로 우리가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구원, 곧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길은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적, 그분의 삶을 단순히 지적인 차원에서 객관적으로 알고 믿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됩니다. 앞선 객관적인 앎을 바탕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으로 다가오셨듯이, 우리도 사랑의 관계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의 ‘인격’을 믿고 그분과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 수 있으며, 그분을 보내신 하느님을 알게 되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 행위의 핵심을 더욱 분명하게 이해하기 위해 다시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에 도움을 청해 봅시다. 5항은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의 행위에 대하여 설명하는 데 이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지성과 의지의 완전한 순종을 드러내고, 하느님께서 주신 계시에 자발적으로 동의함으로써 자기를 온전히 그분께 자유로이 맡기는 것이다.”
신앙은 단순히 지적인 차원에서의 동의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지성과 의지 모두, 곧 인간 전 존재의 동의가 필요한 믿음의 행위입니다. 이 행위는 결코 협박이나 강요를 통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사랑의 관계에 바탕을 두기에 자유로운 행위가 되며, 그렇게 사랑의 관계 안에 형성된 신앙이기에 당신을 계시하신 ‘분’께 온전히 자신을 맡겨 드리는 의탁의 행위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인격적 사랑의 관계에 바탕을 둔 신앙의 이해는 많은 것을 새롭게 볼 수 있게 합니다. 단순히 성경을 열심히 읽고, 교회의 가르침을 탐구하는 것만으로는 예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물론 지적인 차원에서 그분의 말씀을 이해할 수는 있겠지요. 그 때문에 그분께서 현존하시는 공적인 공동체의 전례와 사적인 기도 생활, 그리고 그분의 사랑을 체험했기에 그 사랑을 살고자 하는 열망에서 비롯된 애덕 실천이 필요한 것입니다. 전례 안에서 선포되는 말씀과 성사를 통해 우리는 언제나 새롭게 그분을 만나며, 기도 생활 안에서 더욱 친밀한 관계를 이루며, 그분의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 애덕의 삶을 통해 그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살아갈 수 있고, 또 살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인격적이란 뜻이 지적인 차원에서의 ‘앎’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전제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감성적으로 그분의 사랑과 자비만을 얻길 원한다면 역사 안에 계시된 예수님이 아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놓은 왜곡된 예수님을 상정해 놓고 그분을 주님이라 여기는 우상숭배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그리고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한 탐구 없이 그분을 사랑할 수 없고, 그분을 사랑하는 친교의 행위 없이 진정으로 그분을 알고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제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만남은 어떻게 가능한지, 그분과의 친교가 결정적으로 이루어지는 때는 언제인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