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생명에 참여케 하시는 신비

신학 칼럼

구원,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의 생명에 참여케 하시는 신비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

2024.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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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 신자들에게 어떤 동기로 성당에 오게 되었는지, 또는 성당에서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설문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평화를 얻기 위해서’라고 답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실상 불안과 공포가 공존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마치 과거의 이야기처럼 되어 버린 팬데믹 상황 속에서 혹시나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지 않을까, 그로 인해 경제적인 위기가 닥쳐와 직장을 잃게 되지는 않을까, 금리가 치솟아 빚에 허덕이며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일본에서 방사능 오염수를 방출한다는데 지금 먹고 마시는 것이 혹시 방사능에 오염된 것은 아닐까. 최근 시청 근처에서 역주행으로 큰 인명 사고를 냈던 교통사고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를 더욱 부추긴 대표적인 사례가 될 것입니다.

 

폴란드의 저명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러한 현대 사회의 현상을 ‘유동하는 공포’라 표현합니다. 이는 ‘인간이 출렁이는 위험 앞에서 언제 어디에서나 겪게 되는 불확실한 불안’으로 인해 생기는 공포를 뜻합니다. 바우만은 자신의 책 《유동하는 공포》에서 다음과 같이 이 공포를 설명합니다.

 

“공포가 가장 무서울 때는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다……. ‘공포’란 곧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위협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 그래서 그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고도로 발전한 과학 기술과 문명 속에 모든 것을 예측하고 대비하며 또 방어할 수 있다고 자부하지만, 언제 어디에서 발생할지 모르는 수많은 위험의 물결 앞에 인간은 더욱더 불안과 공포에 허덕이며 살아갑니다.

 

이런 현실 속에 예비 신자들이 평화를 얻기 위해 성당을 찾아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예비 신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매 주일 미사에 참례하고 또 성경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려는 신앙인들 역시 현대 사회의 무한 경쟁에서 비롯되는 과도한 피로와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 속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를 얻고자 성당을 찾아옵니다. 자기 힘만으로는 평화에 이르기 어렵다고 인정한 신앙인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의 존재를 찾아 그분의 은총으로 영혼과 육신의 안녕, 지상에서의 평화와 행복을 찾아 성당에 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에게 솔직하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신앙을 통해 내가 바라는 평화를 얻게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 것일까? 아니, 더 근원적으로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평화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이 나의 평화를 채워 줄 수 있는가? 신앙생활의 이유는 진정 무엇인가?

 

이 모든 질문은 신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을 요청합니다. 각자가 다르게 생각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 베풀어 주시고 교회를 통해 전해 주신 근원적인 신앙의 특징을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 현대 교회의 쇄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공의회의 결실을 전해 주는 여러 문헌과 교령들 가운데 신앙을 이해하기 위해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바로 〈계시 헌장〉입니다. 이 헌장의 본래 제목은 ‘하느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으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어떻게 계시하시고, 인간은 이 계시를 어떻게 깨닫고 응답할 수 있는지 설명합니다.

 

먼저 계시의 본질과 목적을 설명하는 〈계시 헌장〉 2항을 살펴봅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선성과 지혜로 당신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시는데, 이는 인간 이성의 힘으로 다다를 수 없는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시기 위함이며, 이를 통해 인간이 삼위일체 하느님만이 누리시는 ‘영원한 생명’에 참여케 하려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본성이라 표현되는 ‘영원한 생명’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탄생과 죽음이라는 정해진 생명을 살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imago Dei’으로 창조되어 하느님과 의로운 관계를 누리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하느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느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그 결과, 하느님과 누리고 있었던 ‘원의原義’, 곧 원초적 의로움의 상태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첫 인류의 범죄를 뱀의 유혹과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라는 소재들을 통해 설화적으로 설명하고, 교회는 ‘원죄原罪’라는 신학적 용어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원죄로 인하여 인간이 고통과 죄와 죽음의 그늘 아래 살아가게 되었으며, 이 죄의 결과는 첫 인간의 후손이라 할 수 있는 모든 인간에게 미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셨습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이처럼 인간은 본래 하느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통해 완전한 평화로움을 누리며 살았지만, 원죄의 결과로 태어남과 죽음이라는 한계 안에서 고통과 죄에 허덕이며 살아가야 하는 유한한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이 성경과 성전에서 가르치는 그리스도교 인간관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죄와 죽음의 굴레 속에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창조 때 누리던 당신과 의로움의 관계를 회복하여 다시금 당신 본성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인간을 ‘구원救援’하셨습니다. 여기서 구원이란 사전적 의미로 ‘어려움이나 위험에 처해 있는 누군가를 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행위’입니다. 만약 인간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장나 버리는 운명에 놓여 있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이 가져오는 완전한 ‘허무함’에 인간을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 너머 당신만이 누리시는 영원한 생명에 우리를 다시 참여시키시기 위하여 당신이 계획하신 인간 구원의 역사를 펼쳐 가십니다. 그래서 죽음은 허무한 끝이 아니라 인간이 지음을 받은 그대로 모습으로 회복하는 관문, 곧 창조 때 누리던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되찾는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우리는 그분의 본성인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 믿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삶은 결코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한 것이 아니라,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순간으로 변화됩니다. 이것이 바로 〈계시 헌장〉 2항이 표현하는 하느님 계시의 본질이며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교회의 문을 두드리고 예비 신자 교육을 받아 세례를 통해 신앙을 선물로 받게 된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구원’을 얻기 위해, 곧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우리가 받은 신앙을 성숙시켜 나가고 있습니다. 〈계시 헌장〉의 가르침에 따라 신앙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성과 지혜로 계시하신 당신의 뜻을 깨닫고 믿음으로 받아들여,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리라 희망하는 것이며, 하느님께서 가르쳐 주신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이해는 우리가 성당에서 와서 하느님을 통해 얻고자 하는 ‘평화’가 과연 무엇인지 새롭게 바라보게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평화와 다릅니다. 단순히 어떠한 고통도, 어려움도 없는 상태, 또는 일없이 놀고먹는 무위도식의 상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란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시간 속에서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구원을 얻게 될 것임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부단히 노력하는 곳에서 얻게 되는 ‘힘든’ 평화입니다. 이 평화는 모든 불안과 공포로부터 우리를 이겨 내게 하는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달리 표현한다면, 진정한 신앙을 살아가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여정에서 함께 찾아가 봅시다.

 

Profile
서울대교구 사제. 프랑스에서 교리 교육 신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WYD 법인 사무국 및 기획 사무국 국장으로 활동 중입니다. 신자들이 신앙을 통해 하느님과 기쁘게 만나도록 다양한 분야에서 힘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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