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버킷 리스트 No.1, 산티아고 길에서 배운 것

가톨릭 예술

인생 버킷 리스트 No.1, 산티아고 길에서 배운 것

진정한 순례는 가족들이 기다리는 대문을 여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2026. 01.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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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와 무관하게 이제는 수많은 사람의 인생 버킷리스트가 되어 버린 산티아고 순례 길. 저는 지난 2년 동안 이 길을 두 차례나 걸을 기회를 얻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기회를 제가 스스로 만들어 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릅니다. 사회복지 현장에서 사목 활동을 하는 제 직업적(?) 특성상, 프랑스에서 출발하는 전통적인 루트를 따라 긴 여정을 떠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순례 인증을 받을 수 있는 최소 구간인 마지막 110km의 약식 순례 코스를 택했습니다. 그러나 약식이라는 말에 걸맞지 않게, 결코 만만치 않은 거리였습니다. 한국과 비교해 보니, 대구에서 대전까지의 꽤나 긴 여정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혼자가 아니라, 대구카리타스 직원들로 구성된 순례단을 인솔해야 했기에 그 부담은 더욱 무겁게 다가왔습니다.

 

이 프로젝트를 기획한 저는 순례단의 항공권과 숙소 예약부터 이동 동선과 경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세부 계획을 몇 달 동안 홀로 준비해야 했습니다. 현지에서는 통역과 가이드 역할까지 맡아, 그야말로 온 힘을 다해야 했습니다. 덕분에 마드리드 공항에 도착한 첫날, 긴장의 여파로 제 입술이 터져 버렸습니다.

 

첫날은 시차 적응을 위해 마드리드 시내를 가볍게 둘러보았습니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프라도 미술관을 방문했고, 다음 날 아침에는 기차역 근처 본당에서 직원들과 함께 주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과거 7년 동안 남미 볼리비아에서 해외 선교를 했던 경험 덕분인지, 스페인은 제게 낯설기보다는 언어와 문화가 친숙한 이웃처럼 느껴졌습니다.

 

마침내 도착한 지 사흘째 되는 날, 순례 길의 출발지인 작은 시골 마을 사리아에서 본격적인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매일의 순례를 마치면 빨래를 하고 마을을 둘러볼 시간을 조금이라도 확보하기 위해 매일 아침 7시에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 산골의 아침 7시는 여전히 캄캄한 새벽이었습니다.

 

짙은 어둠을 뚫고 걷기 시작하면 어느덧 전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순례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됩니다. 무거운 배낭과 지팡이에 의지해 홀로 걷는 이들, 두 손을 꼭 잡고 나란히 걸어가는 노부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는 자전거 순례단, 반려견과 함께 길을 걷는 가족들, 그리고 시끌벅적한 수학여행 분위기의 스페인 중고등학생들까지……. 길 위에서 마주하는 순례자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가지각색이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길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체력적인 한계보다 발바닥 물집이 먼저 찾아왔습니다. 사리아에서 시작하는 코스는 한국으로 치면 그저 작은 동산을 오르내리는 정도의 높낮이에 불과했지만, 며칠째 이어지는 오르막과 내리막에 새 신발에 쓸려 상처가 난 탓이었습니다. 그날도 캄캄한 숲길을 느린 걸음으로 걷고 있을 때, 뒤에서 덜컹거리는 묘한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우리 곁을 지나갔습니다.

 

휠체어를 탄 채, 땀을 뻘뻘 흘리며 홀로 오르막을 오르는 지체 장애인 순례자의 모습이었습니다. 어둠을 가르며 묵묵히 오르는 그의 모습에 우리 중 누군가는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그 순간, 이름 모를 타국의 한 순례자를 통해 인생은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무게가 있고, 각자에게 맞는 속도로 걸어가는 순례임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넷째 날 아침, 몸은 이미 두뇌의 지시와는 무관하게 저절로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응원하듯, 밝게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갑자기 등 뒤로 신비로운 노랫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순간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여성 순례객 서너 명이 무반주로 부르는 노래는 제게 익숙한 곡이었습니다. 신학생 시절, 매일 밤 묵주 기도를 마치며 불렀던 <Salve Regina>였습니다.

 

순간 저는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발걸음을 이어가며, 마치 제 순례 길에 흘러나오는 배경 음악처럼 그 노래에 온전히 빠져들고 싶어졌습니다. 곡이 끝날 즈음, 노래를 부르던 이들이 제 곁을 지나갔습니다. 예상대로 그들은 손에 묵주를 들고 있었습니다. 분명 묵주 기도를 바치며 걷다가 마지막을 찬가로 마무리하는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변화시키는 기도

 

그 순간 저 또한 묵주 기도를 함께 바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침 동행하던 가톨릭 신자 직원들에게 묵주를 꺼내 함께 기도하자고 권했고, 그렇게 다 함께 기도하며 걷는 동안, 우리의 발걸음은 단순한 여정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향하는 거룩한 순례 길로 변모했습니다. 기도의 힘을 다시 한번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살아 있는 주님의 성전이 되어 하느님 안에서 머무르게 될 뿐 아니라, 고통과 외로움, 다툼과 갈등으로 얼룩진 우리의 삶이 거룩한 순례의 길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한국어로 묵주 기도를 소리 내어 바치던 그 시간, 지나가던 이들도 잠시 걸음을 멈추거나 조용히 침묵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단순한 예의나 배려일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언어를 넘어 기도가 빚어내는 성스러운 아우라, 빛의 장막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인생의 BGM

 

묵주 기도를 마친 뒤, 저 역시 누군가의 순례 길에 작은 배경 음악이 되고 싶은 마음에 가장 사랑하는 스페인어 성가 한 곡을 흥얼거렸습니다. 그 노래는 <Dios te salve María>,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이라는 뜻의 성모송 성가였습니다. 이 노래를 처음 접한 것은 남미 볼리비아로 선교사 파견을 앞두고였는데, 현지에서 첫 미사를 봉헌할 때 이 노래를 불러드리겠다는 소망으로 익혔던 곡입니다.

 

어학연수를 시작하기 전, 스페인어 주모경이라도 외우고 싶어 찾아보다가 발견한 곡이었는데, 번역해 보니 멜로디는 물론 가사가 너무도 아름다웠습니다. 이 노래는 앞부분에 성모송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후반부에는 작곡자의 신앙 고백이 깊이 스며 있습니다. 그중 몇 구절은 지금도 제 마음을 깊이 울립니다.

 

마리아님, 저는 지금껏 하늘만 쳐다보며 살았습니다. 혹시나 구름 속에서 당신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발견한 곳은 당신께서 구원자 예수님께 생명을 전달하시던 구유였습니다.”

 

마리아님, 저는 지금껏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서 말하는 그 수많은 기적 가운데서 당신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당신을 만난 곳은 제가 늘상 걸어가던 이 길 한 가운데였습니다. 당신께서는 피곤한 몸을 이끌면서도 평화 속에 잠든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안고 계셨습니다. 마리아님, 당신은 끊임없이 저희에게 생명을 선물하시는 여인이십니다.”

 

마리아님, 저는 지금껏 빛의 망토를 두르신 영광스러운 당신의 모습을 그려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당신은 십자가의 발끝에서 고통으로 울부짖는 당신이었습니다.”

 

이 노래를 번역하면서, 저는 이처럼 현실적이면서도 가슴 벅찬 신앙 고백이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볼리비아 선교지와 산티아고 순례 길에서 산들바람처럼 불렀던 이 노래는 이제 제 인생 순례 길의 배경 음악이 되었습니다. 진정한 순례는 프랑스나 사리아에서 출발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끝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이 기다리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사도 1,11)

 

SNS에서 가톨릭 관련 콘텐츠 중 가장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는 주제는 여전히 기적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노래는, 예수님과 성모님을 기적이나 환상 속에서만 찾으려는 이들에게, 이미 그분께서 우리의 일상 안에 함께 계시다는 복음과 동시에 경종을 전해 주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성가정의 예수님과 성모님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셨고, 오히려 평범한 우리보다 더 고단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저 높은 하늘 위에 계신 분들이 나의 이런 사소한 감정과 복잡한 상황까지 아실까?” 하는 염려는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작은 속사정은 물론,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세어 두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마태 10,30 참조).

 


 

🎵 이제 음악에 마음을 맡기며, 잠시 눈을 감아 보세요!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스페인어 성모송

https://www.youtube.com/watch?v=qjzd2EA42w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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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대구대교구 사제. 현재 일심재활원 원장으로 재직 중입니다. 7년간 남미에서 선교 사제로 살았고, 지금은 6년째 사회 복지 사목을 하는 사회 복지 사제입니다. 또한 온라인에서는 5년째 성경 통독을 돕는 영상을 만드는 유튜버 신부로도 활동합니다. 제 뜻대로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지만, 돌이켜보니 모두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 모든 자리가 제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앞으로 펼쳐질 모든 일에도 감사하며 살아가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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