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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러한 것을 ‘클래식’이라고 합니다. 클래식은 단지 오래된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과 진리를 전합니다. 가톨릭 안에서도 그런 고전은 여전히 우리 삶에서 살아 숨 쉬며, 오늘의 신앙을 비추는 빛이 됩니다.
어떤 음악은 오히려 세월을 통과하며 더 깊은 울림을 지니게 됩니다. 그런 음악을 우리는 클래식이라 부릅니다. 특히 바로크 시대 작곡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음악에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예술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번에는 바흐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 그의 생애가 응축된 걸작 <B단조 미사곡>을 함께 나누려 합니다. |
지난 사순절은 제게 유난히 깊은 고통이 각인된 시간이었습니다. 대통령 탄핵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 속에 나라는 뿌리째 갈라져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혼란에 빠져 있었고, 안동 지역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은 아름다운 자연과 이웃의 삶의 터전을 순식간에 집어삼켰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력하게 하늘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불길이 할퀴고 간 자리에 남겨진 검은 잿더미의 참혹한 모습은, 타들어 간 우리의 내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했습니다.
“형, 유튜브에 우리를 위로할 수 있는 노래 한 곡 불러 줄 수 없을까?”
그즈음, 안동 교구의 친구 신부님에게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제가 가끔 노래 음원을 만들어 개인 유튜브 채널에 올리곤 했지만, 동기 신부님이 직접 노래를 청한 것은 처음이었기에 순간 당황하면서도 마음 한편이 울컥해졌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이가 실의에 빠져 고통받고 있을까? 내가 노래 한 곡 부른다고 해서 과연 무슨 도움이 될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던 중, 문득 코로나 사태 당시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그래, 뭐라도 하자.’
모두 겪었듯, 코로나가 창궐하던 시절은 세상이 멈춘 듯한 시간이었습니다. 미사마저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 앞에서 무력감과 절망감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그때 저는 교회와 세상을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개인 유튜브 채널을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위로의 노래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길어야 1~2년 하겠지 싶었던 일을 어느덧 5년 동안 이어 오고 있습니다. 그러한 경험 때문인지, 이번 부탁 앞에서는 머뭇거림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먼저 유튜브 채널을 통해 후원 모금을 독려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재난민을 돕고 싶어 하면서도 방법을 몰라 주저하고 있었기에, 안동 교구의 특별 후원 계좌와 소식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부탁받은 ‘노래 한 곡’은 쉽지 않았습니다. 오래 고민하다가 내가 직접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위로의 음악을 찾아보자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바흐의 B단조 미사곡
그리하여 선택한 곡은 바흐의 B단조 미사곡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배운 피아노 실력은 거의 사라졌지만, 바흐의 위대함만큼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었기에 오래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수많은 음악가 중 바흐였을까요? 또, 그의 수많은 명곡 가운데 왜 하필 이 미사곡이었을까요?
B단조 미사곡은 독실한 루터교 신자였던 바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남긴 유일한 미사곡입니다. 그는 이 곡을 단기간에 쓴 것이 아니라, 25년에 걸쳐 인생의 여러 시기마다 부분적으로 작곡하였으며 생애 마지막 해에 이르러 하나의 완전한 미사곡으로 완성했습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음악을 넘어, 신앙과 인간의 감정, 음악적 지성과 미학적 완성도가 완벽하게 어우러진 걸작으로, 서양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힙니다.
형식 면에서도 이 미사곡은 중세 전통에 뿌리를 두면서도, 아리아·듀엣·합창·푸가·모테트·콘체르토 등 바로크 시대의 거의 모든 양식을 집약했습니다. 헨델이 세속 군주를 위해 곡을 남겼다면, 바흐는 일생을 종교 음악가로서 하느님 찬미의 소명에 헌신했습니다. 그의 악보 첫머리와 끝에는 언제나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의 표어가 적혀 있었습니다. 루터교 신자였던 바흐가 가톨릭 미사곡을 작곡한 것도, 분열의 시대 속에서 보편 교회의 일치를 지향한 의미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이 곡은 단순히 전례 음악이 아니라, 바흐가 전 생애에 걸쳐 하느님께 바친 음악적 고백이자 인류 전체를 향한 구원의 드라마를 음악으로 형상화한 위대한 고백입니다.
바흐는 이 미사곡을 슬픔과 경건함의 상징인 B단조로 시작했으나, 후반부에 이르면 환희와 희망의 조성인 D장조로 옮겨 갑니다. 이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부활의 희망으로 전환되고, 마침내 영원한 평화로 나아간다는 시대를 초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B단조 미사곡을 시작하는 곡은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Kyrie Eleison)’입니다. 단 세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짧고 오래된 기도는 오늘날 미사 전례에서 ‘자비송’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흐는 이 단순한 문구를 장엄하고 정교한 푸가로 엮어 내어, 음 하나하나가 눈물처럼 떨어지는 듯한 깊은 울림을 만듭니다. 이는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온 존재로 바치는 회개와 간절한 자비의 요청처럼 들립니다.
이 곡은 소프라노 두 파트, 알토, 테너, 베이스의 5성부 대위법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각 성부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거룩한 조화를 이룹니다. 르네상스 가톨릭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바흐 특유의 푸가 기법으로 재창조되었습니다. 그 결과, 단순한 합창처럼 들리지만 실제로는 각 성부가 기도를 주고받으며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구조를 이룹니다. 음악은 단순하면서도 정교하고, 감정은 슬픔·회개·경외가 한데 어우러져 듣는 이를 기도의 자리로 이끕니다.
웅장하고 묵직하게 전개되는 이 곡은 마치 영혼이 하늘로 치솟는 나선형 회오리와도 같아, 듣는 이를 성스러운 공간으로 이끌어 줍니다. 차 안처럼 밀폐된 공간에서 혹은 눈을 감고 이어폰으로 들어 보면, 마치 시간과 공간이 멈춘 곳에 있는 듯한 신비로운 체험에 빠져듭니다.
잔잔한 카타르시스, ‘하느님의 어린양’
B단조 미사곡의 마지막 부분 ‘하느님의 어린양(Agnus Dei)’은 알토 독창과 현악 반주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단순한 반주가 아니라, 서로 교차하며 얽히는 현악의 선율 위에 구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알토의 목소리가 얹어져, 한 인간의 간절한 탄식이 하늘로 흘러가는 듯합니다.
이 아리아는 절제된 슬픔 속에서 듣는 이의 마음을 서서히 깊은 침묵의 기도로 이끕니다. 격렬하게 울음을 터뜨리기보다, 꾹꾹 삼킨 눈물을 기도로 승화시키는 느낌을 줍니다. 특히 바흐가 B단조와 G단조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흐리게 하여, 선율이 공중에 아련히 흩날리는 듯한 효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탄식의 깊이를 더욱 풍요롭게 하고, 곡 전체의 영적 차원을 마침내 초월적 경지로 끌어올립니다.
어느 날 문득 예술이 건네는 위로
예술은 그 자체로 치유의 힘을 지니며, 듣는 이의 마음 상태에 따라 그 힘은 배가됩니다. ‘슬픈 음악은 자신이 이해받고 있다는 느낌을 주어 정서적 안정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는 여러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 외롭고 우울할 때는 밝은 음악보다 오히려 슬픈 음악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실 음악은 취향을 많이 타기에, 개인의 음악적 세계를 대중 앞에 공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물며 바로크와 같은 특정 시대의 음악이나 특정 곡을 좋아한다고 말하기란 더욱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술이 가진 힘을 매일 경험하며, 제가 이 음악으로부터 위로받은 것처럼 누군가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나누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이 곡을 채널에 소개한 뒤, 많은 이들이 큰 위로를 받았다며 감사 인사를 전해 주었습니다.
이번에 소개해 드린 바흐의 B단조 미사곡, 그중에서도 첫 곡과 마지막 곡은 마음껏 울 수도 없는 이들에게, 차마 가슴에 묻어 두기엔 너무나 아픈 이들에게 깊은 위로가 되는 음악이라 생각합니다.
추천드리는 음원은 바로크 음악의 거장 필리프 헤레베허가 이끄는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의 연주입니다. 특히 Agnus Dei는 세계적인 카운터 테너 안드레아스 숄의 목소리로 녹음되어 감동을 배가시킵니다. 더 느리고 엄숙하며 애절한 해석을 원하신다면, 크리스타 루트비히가 노래하고 카라얀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버전을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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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음악에 마음을 맡기며, 잠시 눈을 감아 보세요!
콜레기움 보칼레 겐트 ver. https://www.youtube.com/watch?v=g1odSgr247Q 베를린 필하모닉 v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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