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에도 계산기가 필요할까요?

성경 이야기

용서에도 계산기가 필요할까요?

연중 제24주일│일곱 번을 넘어, 일흔일곱 번까지 사랑하는 법

2026. 0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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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히 묵상해 봅시다.

 

  • 나는 누군가의 잘못을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되풀이해서 세고 있나요?
  • 아직도 놓지 못하고 있는 내 마음속 백 데나리온은 무엇인가요?
  • 내가 먼저 하느님께 받은 용서와 자비를 기억한다면, 오늘 누구를 조금 더 놓아줄 수 있을까요?

 


 

주님, 도대체 몇 번까지요?”

 

오늘 복음은 베드로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이 질문 안에는 베드로의 현실적인 고민과 함께, 어쩌면 조금은 자랑스러운 마음도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세 번 정도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여기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베드로가 말한 일곱 번은 매우 관대한 제안이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속으로 이 정도면 주님께서 칭찬해 주시겠지.’ 하고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의 계산을 단번에 넘어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 말씀은 단순히 숫자를 늘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용서할 때는 숫자를 세는 계산기 자체를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왜 그래야 하는지를 하나의 비유를 통해 들려주십니다.

 

비유 속에는 두 개의 빚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일만 탈렌트이고, 다른 하나는 백 데나리온입니다. 당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고, 한 탈렌트는 약 육천 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그러니 일만 탈렌트는 한 개인이 평생을 일해도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입니다. 반면 백 데나리온은 백 일치의 품삯으로, 적지 않은 돈이지만 일만 탈렌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액수입니다.

 


 

내 빚은 잊고, 남의 빚만 세고 있지는 않나요?

 

우리는 이 복음을 읽으며 흔히 동료의 목을 움켜쥔 종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사실 우리 역시 일만 탈렌트를 탕감받고도 백 데나리온을 붙들고 사는 사람일 때가 많습니다.

 

누군가가 내게 준 상처와 모욕, 손해와 배신은 마음속에 아주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반면 내가 하느님 앞에서 지었던 수많은 죄와 부족한데도 주님께서 거저 용서해 주신 은총은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결국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의 깊은 뿌리에는 상대의 잘못만 크게 보고, 내가 먼저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은 잊어버리는 영적 망각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픈데 어떻게 용서하나요?

 

우리가 용서를 어려워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용서를 감정의 문제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용서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용서는 상처가 아프지 않다고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말과 행동 때문에 상처받았다면 그것은 분명 아픈 일입니다. 백 데나리온의 빚이 실제였던 것처럼, 우리가 받은 상처도 실제입니다. 그러나 용서는 그 상처의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처에 대한 판단과 심판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결단입니다.

 

상처는 남아 있을 수 있지만, 그 상처를 붙들고 끝없이 미워하며 살지는 않겠다고 결심하는 것, 그것이 용서입니다.

 


 

잠깐, 나도 먼저 용서받았잖아요

 

또한 용서는 내가 도덕적으로 훌륭해서 베푸는 선행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큰 빚을 탕감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은총의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용서의 근거는 언제나 여기에 있습니다.

 

너는 먼저 용서받은 사람이다.”

 

하느님의 자비는 내 안에만 머물러 있으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하여 다른 이에게 흘러가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는 삶은 단순히 어떤 사람을 미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게 흘러 들어온 하느님의 자비를 그 자리에서 멈추게 만드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붙잡고 있는 줄 알았는데, 붙잡혀 있었습니다

 

비유의 마지막에서 임금은 자비를 입고도 자비를 베풀지 않은 종을 다시 감옥에 가둡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색하시다는 뜻이 아니라, 용서를 거부하는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미움과 분노 안에 가두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상대를 미워하고 붙들어 두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 미움과 분노가 먼저 내 마음을 감옥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실제로 용서하다로 번역된 성경의 원문 동사 아피에나이(ἀφίεναι)놓아주다’, ‘떠나보내다라는 뜻을 지닙니다. 마음속에 묶어 둔 미움과 증오의 사슬에서 상대를 놓아주는 것, 그리고 그 사슬에서 나 자신도 풀려나는 것이 용서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속 백 데나리온은 무엇일까요?

 

그러므로 오늘 복음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지금 내 마음속에 붙들고 있는 백 데나리온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놓지 못하는 상처가 있습니까?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굳어지는 사람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우리가 오늘 당장 모든 감정을 내려놓기를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 상처를 주님 앞에 가져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주님, 이 사람이 제게 준 상처는 분명 아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 삶의 더 큰 빚을 먼저 용서해 주셨으니, 저도 이 상처를 주님 손에 맡기겠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이미 용서의 시작입니다.

 


 

놓아준 것은 그 사람인데, 자유로워진 것은 나였습니다

 

용서는 상대의 잘못을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상처를 억지로 잊어버리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그 상처와 미움에 더 이상 내 마음을 빼앗기지 않겠다고 하느님 앞에서 선택하는 것입니다.

 

상대를 미워하는 동안 나는 그 사람에게 내 마음을 묶어 둔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조금씩 용서의 길을 걸어갈 때, 나는 비로소 그 미움과 분노의 감옥에서 풀려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용서는 상대를 위한 행위인 동시에, 하느님 안에서 나 자신이 다시 자유로워지는 길이기도 합니다.

 

오늘, 내가 붙들고 있는 백 데나리온을 주님께 조용히 내려놓아 봅시다. 그리고 내가 먼저 받은 일만 탈렌트의 자비를 기억하며, 다시 한 걸음 용서의 길을 걸어가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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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춘천교구 사제. 현재 교구장 비서 겸 사무국장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달리기를 좋아해 매일 아침 10km, 주말에는 30km정도를 달리며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합니다. 때로는 힘들지만, 그 고비를 넘어서면 ‘러너스 하이’라는 큰 기쁨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죽을 것 같이 힘든 순간’에도 곧 기쁨이 찾아오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으며 오늘도 기쁘게 달리며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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