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복은 입고 있는데, 신앙은 괜찮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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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용히 묵상해 봅시다.
수사님이 웃어서 수도원에 갔습니다
1996년, 저는 수사님들의 웃는 모습이 좋아 수도회에 입회했습니다. 수도 생활 2년 차에는 청원자가 되면 받는 수도회 배지가 부러웠습니다. 오른쪽 가슴에 배지를 다는 순간 검은 수도복이 입고 싶어졌고, 검은 수도복을 입는 날 제대 앞에 자신의 온 존재를 바치는 종신 서원식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습니다. 종신 서원 당일, ‘종신을 축하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보는 순간 저는 성체와 성혈을 들어 높이는 꿈을 꾸었고, 저는 수사 신부가 되었습니다.
나, 꽤 괜찮은 수도자인 줄 알았습니다
수도회 신부로서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주어진 일들과 새로 시작하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려 노력했습니다. 책도 많이 읽고, 면담과 고해성사에도 열심히 임했죠. 그렇게 살다 보니 스스로 참 괜찮은 수도자임을 자부하기 시작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제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고, 다양한 사람들은 저를 하나의 모습이 아닌 다양한 모습의 ‘모이세’로 알아봐 주기 시작했습니다. 오두방정 떠는 모이세 신부, 진지한 모이세 신부, 다정한 모이세 신부, 아빠 모이세 신부, 엄마 모이세 신부 등 말이죠. 다양하게 불리긴 했지만, 끝에 ‘신부’ 또는 ‘수사’라는 명칭이 살아 있어, 그나마 수도자라는 존재가 든든한 배경이 되어 주는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철학자 라캉은 존재는 타자의 담론이라고 했던가요. 주변 사람들로부터 저의 존재가 다양하게 인식되었지만, 수도자라는 바탕 위에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점점 하느님으로부터 수도자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깨달아 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없으면 나는 누구일까요?
하느님과 나만 남겨진 자리에서 저는 매일 스스로 수도자인지 묻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누군가가 제게 와서 물어보는 듯했습니다. 남들 앞에서는 단정한 예복을 갖춰 입고, 하느님 앞에서 멈추어 기도하라고 힘주어 말하지만, 아침 기도 시간을 알리는 알람을 끄고, 멈추어 기도하기보다는 SNS나 유튜브에 시선을 빼앗기는 나는 남들 앞에서 입고 있는 단정한 예복을 홀로 있을 때도 입고 있는지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람을 끄는 순간, 예복도 벗었습니다
끓는 물에는 펄쩍 뛰어 도망가지만, 차가운 물로 시작해 서서히 온도를 높이면 그 안에서 죽어 버리는 개구리처럼. 나도 밖에서는 보기 좋은 하느님 예복을 입고 있다가, 방에 들어와 홀로 있을 때는 쉽게 벗어 버리는 얄팍한 수도 생활을 하는 수도자가 되어 버린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타자의 좋은 담론들에 취해 스스로 돌아보지 못했나 봅니다. 내가 선택해서 살고 있는 수도 생활인 줄 알았는데, 당신께서 부르지 않으시면 한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수도 생활임을 잊고 지냈나 봅니다.
아무도 안 보면 예복을 벗어도 될까요?
“‘고을 어귀로 가서 아무나 만나는 대로 잔치에 불러오너라.’ 그래서 그 종들은 거리에 나가 악한 사람 선한 사람 할 것 없이 만나는 대로 데려왔다. 잔칫방은 손님들로 가득 찼다.”(마태 22,9-10)
우리 또한 누구나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하느님의 잔치에 조건 없이 부르심을 받은 우리입니다. 우리 역시 타자 앞에서는 신앙인의 예복을 갖춰 입고, 홀로 있을 때는 슬쩍 벗어 버리는, 본능에 충실한 나로 돌아가고 있지는 않은가요? 타자 앞에서 부끄럽지 않기 위해 드러내는 신앙이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에게 맞는 예복을 입혀 주셨습니다.
초대장은 이미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홀로 있을 때가 없습니다. 언제나 내게 예복을 입혀 주시며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실 하느님과 함께 있는 것이죠. 그러므로 타자 앞이나 홀로 있을 때나 주님께서 입혀 주신 예복을 잊지 맙시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입혀 주신 예복을 입고 있음을 점차 잊어 갈 때쯤, 하느님께서는 조용히 내게 다가와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마태 22,12)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우리는 그분께 이미 선택된 사람들이요, 이미 주어진 예복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해 주신 예복을 입고, 하느님 나라의 멋진 잔치에 참여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마태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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