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성경의 단어들” 시리즈의 아티클로 <‘체데크’, 다시 정의로워져야 할 시간>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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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초 안에 읽는 핵심 포인트
✔ 히브리어 ‘샬롬’은 단순히 갈등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온전함과 충만함을 뜻한다. ✔ 성경이 말하는 평화는 개인의 마음에 머물지 않고 관계와 공동체, 피조물 전체의 온전함을 향한다. ✔ 그리스도의 평화는 힘으로 억누르는 평화가 아니라 사랑과 정의 안에서 회복되는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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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운데 평화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법정에 선 원고도 피고도, 다투는 부부도, 불면의 밤을 보내는 이도, 심지어 전쟁터의 군인까지도 모두 어떤 의미에서는 저마다 생각하는 ‘평화’를 갈망한다. 그럼에도 어째서 평화는 이토록 오지 않는가? 왜 우리는 평화를 원하면서도 평화를 이루어 내지 못하는가? 혹시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와 하느님이 약속하시는 평화가 애초에 달랐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평화를 대개 ‘갈등이 없는 상태’로 이해하곤 한다. 전쟁이 끝나면 평화가 오리라. 논쟁이 멈추면 평화가 오리라. 고통이 사라지면 평화가 오리라. 대개 이런 식이다. 그러기에 ‘강제’와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우리가 생각하는 평화로운 상태를 구축해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히브리어 שָׁלוֹם(샬롬)은 처음부터 이와는 사뭇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샬롬: ‘갈등 없음’이 아닌 ‘충만함’
우리말 ‘평화’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샬롬’은 ‘완전하다’, ‘온전하다’라는 뜻의 ‘샬람’과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이다. 같은 어근에서 파생된 ‘실렘’(שִׁלֵּם)은 ‘갚다’, ‘배상하다’를 뜻한다. 잃어버린 것을 복원하여 완전한 상태로 돌려놓는 것, 이것이 샬롬의 어근이 담고 있는 핵심 이미지다.
개신교 신학자 코르넬리우스 플란팅아(Cornelius Plantinga Jr.)는 샬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였다.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정의와 충만함과 기쁨 안에서 하나로 엮이는 것, 이것을 히브리 예언자들은 ‘샬롬’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단지 마음의 평안이나 적들 사이의 휴전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 이는 자연적인 필요가 충족되고 타고난 은사가 풍성하게 발휘되는 풍요로운 상태이며,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이 기뻐하시는 피조물들을 문을 열어 환영하실 때 터져 나오는, 그 기쁨에 찬 경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상태입니다. 다시 말해, 샬롬은 만물이 본래 있어야 할 모습(the way things ought to be)입니다.”_코르넬리우스 플란팅아, 《Not the Way It's Supposed to Be: A Breviary of Sin》
창세기 1장을 읽으면 하나의 리듬이 눈에 들어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그 공간과 시간을 질서 있게 채우실 때마다 성경은 거듭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라고 전한다. 그리고 여섯째 날, 모든 것을 완성하셨을 때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라고 한다(창세 1,31). 이 ‘좋음’(טוֹב, 토브)의 상태는 샬롬이 가리키는 온전함과 맞닿아 있다. 모든 피조물이 제자리에 있고, 서로 해치지 않으며, 번성하고,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 있는 상태 말이다.
창조는 바로 이 샬롬을 향해 설계되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그것이 깨어지고 만다. 어떤 의미에서 첫 인간들의 불순종은 단순한 도덕적 실패가 아니었다. 그것은 관계의 손상, 즉 하느님과의 관계, 인간들 사이의 관계, 인간과 피조물 사이의 관계를 ‘본래 그래서는 안 될 모습’으로 일그러뜨린 사건이었다.
이스라엘은 오랜 역사를 거치며 죄가 가져오는 결과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평화의 상실임을 깨달았다. 이에 시편 85편은 그 회복의 날을 간절히 꿈꾼다.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시편 85,11)
피조물 전체의 온전함을 향해
부활하신 분이 선포하시는 평화의 인사는 단순한 위로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죄와 죽음이 깨뜨린 창조의 온전함이 당신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회복되기 시작했다는 장엄한 선언이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이를테면 ‘갈등의 소강 상태’라면,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는 히브리적 샬롬 본연의 의미, 곧 온전함을 회복하는 평화라 할 수 있다.
레오 14세 교황께서 이 평화를 “무장하지 않은 평화, 무장 해제시키는 평화, 겸손하고 항구한 평화”라고 표현하신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힘으로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손에 든 무기를 내려놓게 하는 사랑의 힘으로 오는 평화. 오직 그것만이 지속 가능하며 모두를 살리는 샬롬, 곧 그리스도의 평화다.
샬롬을 오해하는 가장 흔한 방식은 그것을 순전히 개인의 내적·영적 상태로 축소하는 것이다. 물론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 개인적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샬롬은 처음부터 훨씬 더 넓은 관계의 범위를 가리킨다. 예레미야서 29장 7절은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하느님께서는 바빌론에 유배 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렇게 명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를 유배 보낸 그곳에서 그 성읍의 평화를 구하고, 그 성읍을 위하여 주님에게 기도하여라. 너희의 평화가 그 성읍의 평화에 달려 있다.”(예레 29,7)
자신들을 정복한 바빌론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라는 이 당혹스러운 명령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진정한 평화란 그저 개인이나 그 개인이 속한 ‘우리’만의 것이 아니라, 자신과 연결된 모든 이와 세상, 나아가 피조물 전체의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만일 평화가 단순히 갈등의 부재를 의미한다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를 굴복시키고 갈등의 싹을 없애면 그만이리라. 그러나 진정한 샬롬을 만들어 가는 것은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수고로움과 껄끄러운 관계를 부단히 가꾸어 가려는 노력을 요구한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생각과 말과 행위의 주도권을 쥐려는 욕심을 멈추고, 상대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된다.
“요란하고 강압적인 소통이 아니라 경청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약자의 목소리를 모을 줄 아는 소통이 필요합니다. 말을 무장해제하여 지구를 무장해제하는 데 기여합시다.”_레오 14세 교황, 언론인 대표단 연설, 2025년 5월 12일
두 개의 도성, 두 개의 평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신국론》에서 두 종류의 도성을 구별한다. 지상 도성의 평화는 현세의 질서와 이해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잠정적 평화다. 물론 그것 역시 필요하고 선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천상 도성의 평화는 하느님과의 완전한 일치 안에서 오는 충만함이다.
성인은 이 두 도성이 현세에서 뒤섞여 있다고 본다. 이는 완전한 샬롬 역시 ‘아직’ 오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렇다. 그것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그 완성을 향한 여정 위에 있다.
“만물의 평화는 질서의 평온함(Pax omnium rerum tranquillitas ordinis)입니다. 질서란 같은 것들과 다른 것들에게 각각의 자리를 부여하는 배치입니다.”_아우구스티노 성인, 《신국론》 19권 13장
평화에 관한 이 같은 정의는 샬롬의 히브리적 뿌리와 깊이 공명한다. 각각의 피조물이 제자리에 있는 상태, 그것이 질서이고, 그 질서 안에서 누리는 고요함이 바로 평화다. 그러기에 이는 갈등도, 부침도 없는 단조로운 상태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다양한 것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조화를 이루는 역동적 질서의 아름다움, 이것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샬롬인 것이다.
시편 85편 — 하느님 나라의 설계도
이 시리즈를 마치며 시작점으로 돌아가 보자. 많은 주석가는 시편 85편을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도 여전히 어려움을 겪던 공동체의 기도로 이해한다. 자애와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는 세상. 그것은 그저 한 편의 시적 상상이 아닌, 성령의 영감 안에서 계시된 하느님 나라의 설계도다.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느님의 자애(חֶסֶד)에 힘입어 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흔들리지 않는 진실(אֱמֶת)의 보루 위에서 하느님과 피조물, 그리고 나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가 회복될 때, 그리하여 저마다의 가치를 보존하고 존중하는 정의(צֶדֶק)가 실현될 때—특히 약자가 소외되지 않고 저마다의 몫이 채워질 때—그곳에 평화(שָׁלוֹם), 즉 만물을 온전하고 풍성하게 하는 창조의 질서가 도래한다.
아무것도 빠지지 않고,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은 하느님의 평화가 하루빨리, 그분의 영광 속에서 봄날의 새순처럼 말간 얼굴로 우리에게 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편 85편의 마지막 구절을 되새기며 이 글을 마친다.
“정녕 그분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가까우니 우리 땅에 영광이 머무르리라.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주님께서도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그 열매를 내어 주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가고 그분께서는 그 길 위에 걸음을 내디디시리라.”(시편 85,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