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vs 비본질

신학 칼럼

본질 vs 비본질

오늘, 우리의 삶은 과연 본질을 바라보는 삶일까요?

2025.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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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소임지는 대전 가톨릭대학교이며, 저는 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들을 맡아서 양성하는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 신입생들과 함께 지내며 그들의 성소 이야기를 들어 보면, 정말 각양각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본당 신부님을 보며 사제직의 꿈을 키워 온 사람도 있고, 고등학교 때 교목 신부님을 보고 갑자기 사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기도하며 사제직의 꿈을 키운 사람도 있고, 가족 모두가 성당을 다니지 않는데도 홀로 신앙을 지키며 사제직을 희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렇듯 신학교에 갓 입학한 신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하느님께서 정말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고 계심을 느끼게 됩니다.

 


 

달걀이 아니라 하느님

 

그 순수한 성소 동기가 한없이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약간의 불안감이 마음속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신학생들은 대부분 사제직의 아름다운 모습에 매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자들에게 존경받고 사랑받는 사제의 모습, 혹은 치열하게 자신을 투신하며 사랑을 살아가는 사제의 모습을 보며 막연하게나마 저런 사제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나는 것이지요. 물론 그런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간 그 순수했던 신학생들도 사제의 삶이 언제나 그렇게 눈부시게 빛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느끼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꿈꿔 온 사제의 모습과 현실이 다르다는 사실을 맞닥뜨리는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사실 사제직을 향해 나아가면서, 사제로 살아가면서 성소는 정화되고, 변화하고, 성장해 나가야 합니다. 어떤 어른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떠오릅니다.

 

나는 달걀이 먹고 싶어서 신학교에 갔어.”

 

그 신부님께서는 몹시도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내셨는데, 본당 신부님이 집에 방문하시는 날이면 어머니께서 항상 신선한 달걀 하나를 부쳐서 내셨다며, 당신은 그 달걀이 너무 먹고 싶어서 사제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품으셨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신학교에 들어가서 양성을 받으며 그 신부님의 성소는 변화되고 정화되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달걀을 통해서도 한 사람을 부르시는 분이시지만, 하느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정말 본질적인 것은 달걀이 아니라 하느님임을 알게 해 주시는 분이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학교에서 지내며 신학생들의 성소를 키우는 일을 하고 있다 보니 저도 모르게 스스로의 성소를 돌아보는 순간이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저의 성소를 돌아볼 때면, 자연스럽게 내가 바라던 사제직이 무엇인지, 내가 지금 기꺼워하는 사제직이 무엇인지 스스로 묻게 됩니다. 저의 그러한 질문은 결국 본질과 부차적인 것 사이의 긴장, 그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제가 느끼는 데서 오는 것이겠지요.

 


 

사제직의 본질

 

사제직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요? 물론 한마디로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굳이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사제직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을 대신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사제로 살아가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제가 예전에 바란 것이 정말 그런 것이었나 하는 의문이 듭니다. 어쩌면 제가 바란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닮는 것이 아닌,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는 그분의 모습, 영광과 존경을 받는 그분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어쩌면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행하신 일을 대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모두에게 손쉽게 인정받는 삶의 방식을 택한 것 아니었을까.’

어쩌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통이 아닌, 그분의 영광과 권능만을 바란 것이 아니었을까.’

 

때로는 제가 받은 소임에 불만을 터뜨리기도 합니다. 겉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왜 나에게 이런 자리를 주시는 것이냐고 하느님께 따지기도 합니다. 소임지를 비교하고, 평가하고, 가고 싶은 곳을 꿈꾸는 저의 모습은,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과는 너무도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때로는 몇 푼 되지 않는 돈에 기뻐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돈 때문에 화를 내기도 합니다. 때로는 사제의 복지나 사제로 살아가기 위한 삶의 필요조건을 논하다가 분개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지만”(마태 8,20 참조), 아버지께 대한 순명 안에서 온전히 자유로우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겠지요.

 

그런데 애초부터 제가 바랐던 사제직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는 항상 본당 신자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에게 사랑받는 본당 신부의 모습을 그렸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보다 제가 꿈꾸던 사제직을 실현시키고 싶은 마음이 더 크게 자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저에게 놓인 고민은 이러한 질문으로 귀결됩니다.

 

나는 지금 사제직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부차적인 것을 좇고 있는가?’

 

이는 아마 저만의 고민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많은 사제의 고민일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를 통렬하게 비판하셨던 부분 역시 바로 이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본질적인 것이 목표가 될 때 사람이 얼마나 멀리 엇나갈 수 있는지 그분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으로

 

사제로 살아가면서 저의 고민 역시 더욱 깊어지는 듯합니다.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성찰이 깊어질수록, 제가 본질적인 것을 좇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바라보게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생각을 거듭할수록 답이 떠오릅니다. 비본질이 아닌 본질을 찾으라는 것. 저에게 인간적으로 기쁨을 가져다주고 행복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걸어가라는 것.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렇기 때문에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본질을 살아가는 마음에는 근본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마음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본질을 찾는다는 것은 때로 나 자신을 비우고 깎아 내야 하는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사제직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본질을 찾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삶의 자리를 떨쳐 버리는 괴로움과 불편함을 감내할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가 단순히 주일 미사에 참례하는 의무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안정과 평화를 주는 가르침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해 온전히 당신을 내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에 전 존재로 응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마주하는 것은 고통스럽고 불편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본질 없이는 결코 그 사랑의 깊이를 느낄 수 없겠지요. 바다의 깊이를 헤아리기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던 소금 인형처럼, 우리 역시 본질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놓아 버리는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서로를 너무나 사랑하여 자신의 전 존재를 내어 주는 삶을 본질로 하는 혼인 생활 역시, 진정 본질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리는 고통을 겪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혼인 생활에 따르는 안정감이나, 배우자의 봉사와 협력은 나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이라는 본질에 비하면 부차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부차적인 것에 매달릴 때, 혼인 생활은 허무 속에서의 허우적거림이 될 것입니다.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은 고통스럽지만, 그 사랑을 살아갈 수 있을 때 혼인의 본질을 비로소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아니 어쩌면 혼인 생활뿐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삶, 세상 속에 던져진 우리 삶의 의미라는 질문 앞에서도 마찬가지겠지요. 본질을 찾는 길은 고통과 불편함을 수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본질이 아닌 비본질을 살아가는 삶은, 결국 허상을 살아가는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사제직의 본질을 묻지 않는 사제의 삶이 그러할 수밖에 없듯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과연 본질을 바라보는 삶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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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대전교구 사제. 독일에서 카리타스학을 전공했으며, 현재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생을 양성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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