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발타사르의 신학 세계를 탐험하다> 시리즈의 아티클로,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인싸? 아니 아싸!’에서 이어집니다.
체크 포인트!
📚 이 글,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난이도: ★★★☆
→ 신학에 흥미가 있는 분이라면 도전하실 수 있어요.
📝 읽고 나면 얻을 수 있는 것!
- 예술과 신학을 연결하는 신학자 발타사르의 독창적 시선
- 제도권 밖에서 사유한 한 신학자의 도전 정신
- 시대와 문화를 신학적으로 바라보는 깊이 있는 관점
🔎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신학
“신학은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대상으로 삼을 수 있고, 그 대상을 우리들 가까이에 둘 수 있는 유일한 과학이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는 《영광》에서 신학을 ‘과학’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는 서로 반대되는 두 개념을, 게다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한 힘인 과학을 신학의 결과물이라 여깁니다. 더 나아가 그에게는 ‘신학’, 즉 ‘유일한 과학’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큰 욕심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톨릭 교회의 신학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자 처절하게 노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신학과 교회가 세상을 바라보는 일은 매우 힘들고 고된 작업입니다. …… [더군다나]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뿐만 아니라, 자연 종교의 신(神)조차도 언급할 수 없습니다.”
세상 안에서 지녀야 하는 ‘가톨릭의 관점’은 가톨릭 교회와 거리가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보편적 가치를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는 세상 속 드러나는 진리와 연관된 문제에 대해 질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발타사르는 그 어려움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시대를 걱정하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 비판은 역설입니다. 왜냐하면 발타사르는 이 비판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던 교회의 시각,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선한 것’과 ‘그렇지 못한 것’들을 뚜렷이 나누어 옳고 그름을 판단했던 교회의 시선을 반성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네 가지 자세
발타사르는 이 세상의 여러 가지 현실을 바라볼 때, 더 이상 ‘세상의 성스럽지 못함’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대신 “하느님의 것이었던 많은 것들이 세상의 소유가 되어 버린” 지금의 상황을 마주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금의 세상은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확실한 인식을 요구하기 때문에, 현대 기술 세계에서 하느님과 교회로부터 이어지는 ‘종교적 경험’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발타사르는 인간이 세상 속 경험을 통해 인간 스스로가 지닌 탄생과 죽음을 통한 ‘최종 목적지’를 여전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발타사르가 보기에, 이러한 뚜렷한 깨달음은 ‘하느님의 빛’을 인간이 더욱 갈망하게 합니다. 더불어 이 현상은 고대와 중세, 그리고 신화적 사고가 각광을 받던 시대보다는 약해졌지만,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습니다.
이 관점에서 발타사르는 “‘인간 정신’을 통해 하느님의 본질에 보다 가깝게 다가설 수 있는 시도가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그는 이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네 가지 조건을 제시합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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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세상을 바라보는 능력: 세상을 바라볼 때 올바른 가치 기준을 갖고 두 영역의 본질 안에서 상호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다.
② 영적인 힘: 세상이 지닌 다양한 방법들을 정의하고 확정하여 올바른 해결책을 찾을 수 있게 하는 영적인 힘이다.
③ 예술에서 동반되는 기술: 거대한 인간 정신이 지닌 역사의 흐름에서 이어진 다양한 경험
④ 그리스도인의 순수한 열정과 빛: 그리스도인이 지닌 능력으로, 다양한 대상이 지닌 지향과 특별함, 시대적 요구를 알아보고 이를 더 유연하게 발전시키도록 돕는다. |
여기에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애쓰는 발타사르 신학의 진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중심이 교리가 아닌 ‘실천’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에 따르면 믿음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성찰하게 하는데, 이를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왜냐하면 발타사르에게 신약 성경은 규정집이나 편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행동 지침이 되는 그리스도의 모범적 행동을 담은 ‘영적인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 성령께서 주시는 영적인 양식
발타사르는 영적인 양식이 글자와 형태 안에 갇히는 것을 경계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무한하신 하느님을 문자 안에 가두는 맹목적인 ‘성경 중심주의’,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와 은총을 인간이 지나치게 교회 제도 안에만 국한하려 할 때 발생하는 ‘성사 은총의 오류’가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이성적 논리가 과도하게 개입된 교회의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욕심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가시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형태로부터 절대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어떤 인간의 자유도 이것을 침범할 수 없다. 눈에 쉽게 보이는 가시성을 띤 그 무엇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들이지 않거나 거부한다면 어떤 것도 그 견고한 토대가 될 수 없다.”2)
발타사르는 본질을 잃은 교회에 대해 염려와 반감을 지닌 채, 세상 안에서 교회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말씀과 은총을 과도하게 인간이 지닌 힘으로 가시화하면 안 될 것이라는 경고이자, 그리스도의 영을 지닌 채 믿음으로 행동해야 하는 세상 안에서의 교회의 모습에 대한 반성이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이루어졌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지만, 성령께서는 사람을 살리신다.”
발타사르는 코린토 2서 3장 6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이러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내어 주는 종교적 심성과 신앙은 그 의미를 품어내지 못하는 경전과는 무관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의 말이 아닌, 아버지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문자적인 언어가 아닌 성령의 언어로 인도하신다.”3)
발타사르는 그리스도를 믿는 가톨릭 교회가 경전에 매인 종교가 아니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이러한 그의 강조점은 오늘날의 교회가 가장 유의해야 할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언가 알고 싶고, 알려고 하는 태도를 조심스럽게 경고했으며, 그와는 반대로 아무 논리적 근거 없이도 신비를 품을 수 있고, 자유롭게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장소가 줄어든 지금의 상황을 숙고했습니다.
각주
1) 《Cf. Fede e pensiero tomo2 Romano Guardini, 43.》
2) 《Teologia dei tre giorni, 233.》
3) 《Teologia dei tre giorni, 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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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