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타사르, 십자가 아래에 머무는 신앙

신학 칼럼

발타사르, 십자가 아래에 머무는 신앙

고독에서 시작되는 믿음과 ‘나의 고백’

2026. 02. 13
읽음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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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발타사르의 신학 세계를 탐험하다> 시리즈의 아티클로, 발타사르, 빛의 시대에 영의 결핍을 말하다에서 이어집니다.

 


 

체크 포인트!

📚 이 글,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난이도: ★★★☆

신학과 영성, 미학이 만나는 지점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추천

신앙 안에서 행함보다 머묾의 의미를 고민해 본 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고독, 침묵, 십자가 묵상을 자신의 신앙 여정과 연결해 읽어 보세요

 

📝 읽고 나면 얻을 수 있는 것!

발타사르가 이해한 십자가의 고독과 그 신학적 의미

신앙의 기원으로서 머묾관조의 중요성

공동체 중심 신앙 속에서 잃기 쉬운 나의 고백에 대한 성찰

현대 교회와 신앙인이 다시 회복해야 할 고독의 가치에 대한 통찰

 


 

발타사르가 좋아하고 지향했던 모습이 하나 있다. 바로 십자가에 홀로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래에 가만히 머무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다. 발타사르는 그 머묾을 기도라고 여겼다. 발타사르에게 하느님의 십자가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을 통해 십자가를 완벽하게 소유하셨는데, 이는 곧 고통이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를 대신 지고 싶어 하는 우리 인간의 마음은 교만하며 발타사르가 생각하는 최대의 신학이자 묵상, 기도는 그 고독한 십자가 곁에서 무릎 꿇고 가만히 머물며 관조하는 것이었다. 이는 칼 라너(K. Rahner)의 생각과 많이 달랐다. 라너는 인간이 지닌 자조적인 힘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힘입어 무언가 초월하여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의 고통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현대 신학의 두 거장은 서로 결별했다.

 


 

🔎 하느님 십자가의 고독

 

하느님의 십자가가 지닌 그 고독을 통해 우리 세상과 교회는 무엇을 선물 받았는가 설명하는 발타사르의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

 

십자가 죽음의 극단적인 고독에서 파생되지 않는 신앙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죽음의 강한 위협에서 그들을 분리한다. [그리고] 세례를 통해 마침내 시작되는 신앙의 진지한 대화는 그 십자가가 갖는 진정한 의미의 근원으로 이끌어준다. 이렇듯 신앙은 그 기원에 있어서 십자가의 하느님과 세상을 마주하게 하며, 필연적으로 [그것이 강하든, 약하든] 고독을 느끼며 믿게 되는 시작이 동반된다.”

― 《Cordula ovverosia il caso serio

 

발타사르 신학의 가장 중요한 단서는 하느님 십자가의 고독이다. 우리가 지닌 신앙의 기원’, 다시 말해 인간 각자가 처음 존재하게 된 그 상태, 바로 인간 각자가 최초로 인식이 가능하게 된 그 순간, 우리 모두 고독했다.

 

발타사르는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이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극단적인 고독이라고 표현한다. 이 고독에서 신앙이 파생되었다. 우리는 이를 소중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고독에서 파생된 신앙만이 하느님과 세상을 마주하게 한다. 고독을 느끼며 믿게 되는 그 시작이 우리 각자가 지닌 신앙의 원인이다.

 


 

🔎 고독에서 싹트는 세상의 구원

 

고독에 관한 발타사르의 숙고는 이 세상의 구원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고독은 아름다운 세상뿐만 아니라, 비참하고 격렬한 삶의 상처에서도 시작된다. 그러므로 고독은 우리의 삶과 인생의 진지한 지점에서 도래하는 피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마음의 고독으로부터 세상의 구원이 도래했다. 그 마음의 고독은 누군가의 아름다운 고독에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격렬하지만 연약하고 가냘픈 고독으로부터 내쳐진 마음에서 시작된다. 그 고독은 마치 얼어버린 물속에서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은 듯한 마음의 요동일 수 있겠지만, 서슬 퍼런 칼의 칼날처럼, 언제나 동반되는 삶의 상처처럼 사랑의 활기를 불러일으킬 것이다.”

― 《세계의 심장》

 

발타사르에게 인간 각자의 고독, 즉 모두의 삶의 고독은 우리 모두와 세상을 구원하는 힘이 된다. 그 고독은 인간의 삶이 지닌 아픔의 칼날로 드러날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리스도 십자가의 고독이 그러했듯, 신앙의 진정한 근원이 될 수 있다.

 


 

🔎 고독을 중심으로 이루는 교회의 친교

 

고독이 신앙의 진정한 근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은 하느님의 고독을 외면하고, 우리 스스로의 고독을 회피하려는 태도에 경각심을 울린다. ‘자신을 우리라고 지칭하며 스스로 익명화하는 무책임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우리는 세상의 유혹에 약하고, ‘믿음의 공동체교회 또한 종종 예수님의 가르침과 멀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발타사르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한다. 예수님께서 번민과 공포에 휩싸이고 계실 때, 제자들은 세 번이나 잠들어 있었다. 이 모습은 우리와 교회의 모습과 닮았다. 더 나아가 발타사르는 예수님께서 대사제 카야파의 집에 끌려가신 예수님과 그분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마태오 26,58) 있는 베드로를 묵상한다. 이 모든 장면을 통해 발타사르는 우리의 부족함을 성찰하고 그 가운데에서 예수님의 고독이 떠오른다. 우리가 외면한 예수님의 고독은 예수님의 실질적 고통의 시작점이자 인간이 더 큰 죄를 짓게 되는 시발점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신앙은 어떤 모습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의 삶의 외로움을 잊기 위한 친교가 우선시되고 있을까. 나의 고백과 상관없이 선포된 우리 모두의 신앙은 왜곡되어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지금의 교회는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고 따라 살지 않고, 예수님을 외롭게 방치해 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톨릭 교회의 전통은 예수님의 삶을 기억하고 이어가는 것이다. 전통은 단순히 보수적인 옛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이 무분별하게 따라가는 세속화의 물결 앞에서 고독이 지닌 소중한 가치와 의미를 너무 쉽게 내어놓았는지도 모른다.

 


 

🔎 고독, 내 삶 속에서 피어난 하나의 고백

 

예수님의 삶과 십자가의 고독은 성경과 경전에만 존재하는 무언가가 아니다. 이에 대해 발타사르는 그리스도인의 복음 선포는 예수가 행했던 삶 그대로가 꾸준히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교회 공동체의 친교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세상에서 예수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참된 친교 안에서 신앙 고백을 해야 한다. 이 신앙 고백은 내 삶을 통해 이뤄져야 한다. 왜냐하면 전통은 예수님의 삶 전반에 걸친 그의 고독을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며, 이 여정이 발타사르가 성찰한 신앙의 여정이다.

 

발타사르의 신학과 묵상, 기도는 현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지침이 된다. 그의 사상은 고독한 십자가에 매달린 그분 곁에 머물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고 그 고독에 동참하게 되면서 나의 신앙은 더욱 확고해진다. 이때 비로소 나의 고독한 고백친교의 공동체가 되길 희망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홀로 고백한 신앙을 교회 안에서, 교회를 통해 공동체를 이루기를 희망할 수 있다.

 

저는 믿나이다(Credo).”

 

사실 우리는 미사 때마다 신앙 고백을 통해 일인칭 단수 형태로 우리 각자의 믿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이 사실이 함의하고 있는 의미는 매우 크다. 마지막으로 글을 마무리하면서 어느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고 싶다.

 

인간의 사유는 고독이 가장 최고조에 있을 때 결실을 맺는다.”

 


 

요약! 발타사르 신학 세계를 탐험하다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1905~1988)20세기 가톨릭 신학을 대표하는 신학자이지만, 그의 삶의 궤적은 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시대를 깊이 관통하며,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가톨릭출판사는 발타사르의 사상을 한국 가톨릭 신자들에게 소개하고자 이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다만 발타사르의 신학은 문학과 음악, 예술 등 다양한 영역과 맞닿아 있어, 일반 신자들에게는 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에 그의 삶과 사상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가톨릭북플러스 웹진을 통해 시리즈 <발타사르 신학 세계를 탐험하다>를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이 여정에 함께해 주신 최민섭 신부님께 깊이 감사드리며, 이제 네 편의 아티클을 간단히 요약하며 인사를 전합니다.

 

①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 인싸? 아니 아싸!

발타사르는 제도권의 중심에 서 있지 않았지만, 문학과 음악, 예술을 통해 신학의 새로운 길을 연 사상가였다. 그의 신학은 교리 정리에서 출발하지 않고, 인간이 아름다움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는 경험에서 시작된다. 문학과 예술은 그에게 부차적인 도구가 아니라, 신학적 사유의 출발점이었다. 이러한 접근은 그를 위대한 신학자이면서도 아웃사이더로 남게 했다.

 

발타사르, 그가 세상을 보는 시선

발타사르는 신학을 초월적인 아름다움을 다루는 유일한 과학이라 불렀다. 그는 교회가 세상과 단절되지 않기 위해, 현실을 더 깊이 바라보아야 한다고 보았다. 신앙은 교리가 아니라 실천으로 드러나야 하며, 성경은 규정집이 아니라 행동의 지침이다. 문자와 제도에 신앙을 가두려는 태도는 경계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③ 발타사르, 빛의 시대에 영의 결핍을 말하다

발타사르는 계몽주의가 이성을 풍요롭게 했지만, 영적 결핍을 낳았다고 진단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배제한 세계에서 인간은 다시 영성과 의미를 갈망하게 되었다. 그는 고대 형이상학과 미학적 사유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회복해야 한다고 보았다. ‘아름다움은 진리와 선과 분리되지 않는 신학의 핵심이었다.

 

④ 발타사르, 십자가 아래에 머무는 신앙

발타사르는 십자가 아래에서 머무는태도를 신앙의 핵심으로 보았다. 신앙은 고독에서 시작되며, 그 고독을 회피할 때 교회도 왜곡된다고 보았다. ‘우리라는 이름 아래 사라진 나의 고백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각자의 고독한 고백이 살아 있을 때, 친교는 비로소 참된 공동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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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인천교구 사제.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부 부교수를 맡고 있습니다. 현재 김포 사우동성당 주임신부로 4년째 사목하며, 새로운 성전 건축을 준비하는 여정 속에 있습니다. 형이상학적인 신학을 토대로 생각하던 시간을 소중히 간직하며, 지금은 사람의 마음이 부딪치며, 건축의 구조와 벽돌을 공부하며, 땀이 진득한 현장에서 새로운 형이하학을 만나고 있습니다.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이는 곧 우리 삶의 주제이며 철학과 신학의 실재일 것입니다. 저는 이 모든 체험을 소중히 생각하며,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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