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 포인트!
📚 이 글,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난이도: ★★★
→ 신학을 잘 몰라도, 음악·문학·철학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충분히 재밌게 읽을 수 있어요.
📝 읽고 나면 얻을 수 있는 것!
예술과 신학을 연결하는 신학자 발타사르의 독창적 시선
제도권 밖에서 사유한 한 신학자의 도전 정신
시대와 문화를 신학적으로 바라보는 깊이 있는 관점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Hans Urs von Balthasar, 이하 발타사르)는 1905년 8월 12일 스위스 루체른에서 태어나 1988년 6월 26일 바젤에서 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고향인 루체른, 호프키르헤(Hofkirche)에 영면해 있습니다.
발타사르는 가톨릭 교회의 사제이자 많은 역작을 남긴 위대한 신학자입니다. 그리고 성인이 되신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생전 추기경에 발탁했지만, 그 서임 이틀 전에 선종했다는 유명한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의아한 점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발타사르의 인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관통해 있지만, 그의 한 살 위 예수회 동료 카를 라너(Karl Rahner, 1904-1984)처럼 저명한 공의회 교부로 남아 있지 않은 점. 두 번째, 평생 교수직을 멀리한 탓에 뛰어난 당대 유명한 신학 교수로서의 업적이 뚜렷이 남아 있지 않은 점입니다.
20세기에 이르러서야, 발타사르는 베네딕토 16세(Joseph A. Ratzinger, 1927-2022) 교황님에 의해 다시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현재는 로마에 발타사르 연구소Casa Balthasar가 생기고 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풍요롭게 한 신학자라고 평가받고 있지만,그의 사상은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의 제도화된 신학이 아니라고 여겨지긴 합니다.
🔎 아름다운 예술을 사랑한 신학자
발타사르는 신학이 아닌 문학이나 음악 등 예술로부터 학문적 사색을 시작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의 학문적 기반은 여러 학문과의 교류를 통해 이뤄진 것입니다.
발타사르 신학의 특성은 음악과 문학을 통한 미학적 접근이 돋보입니다. 발타사르는 유년 시절부터 음악에 대해 정통한 이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는 자연스럽게 그의 인생 안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음악에 대한 특별한 애정은 1925년, 《음악적 사고의 발전Die Entwicklung der musikalischen Idee》이라는 제목의 수필로 소개되었습니다.
“베토벤의 음악 앞에서 우리는 그 작품들에 서린 그의 피땀을 느낍니다. 그리고 바흐의 작품들 앞에 섰을 때는 마치 웅장한 건축물의 장엄함을 알아가는 듯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르게 되는 모차르트의 방대하고도 거대한, 하지만 어떤 긴장이나 억압조차 섞이지 않은 채 이미 세상에 스며든 것 같은 작품들에서는, 마치 한 아이가 아무런 방해 없이 너무나 완벽하게 성숙해져 버린 감동을 느낍니다.”
발타사르는 뛰어난 음악적 감수성과 음악에 대한 애정을 그 숙고와 성찰을 통해 발전시켰고, 이를 신학적 사색에 접근시켰습니다. 더 나아가 그는 음악을 통해 보다 쉽게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 발타사르, 문학에 풍덩 빠지다
청년 발타사르는 문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그는 독일 문학 안에 존재하는 종말론적인 문제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정리하는 작업에 몰두했습니다. 그의 박사 학위가 신학이나 철학에 관련된 것이 아닌, 문학에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이 문학에 대한 발타사르의 관심을 드러냅니다.
어떤 이는 발타사르가 신학 박사 학위 없이 신학자가 된 특이한 경우라고 말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발타사르는 학생 시절, 독일과 스위스를 오가며 독일 문학을 공부했습니다.
발타사르는 23세가 되던 해, 1928년 취리히 대학에서 〈근대 독일 문학에 있어서의 종말론 사상의 역사〉라는 논문으로 문학 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이 박사 학위 논문은 학문의 경계선 없이 그가 살았던 시대가 갖고 있던 관심사들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였다고 평가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가톨릭 회의 신학이나 철학에 관한 학위는 아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이는 앞으로 펼쳐질 발타사르의 신학자로서의 삶이 가톨릭 회의 제도권 밖 세상에서 드러나는 여타의 학문과 맞닿아 있음을 드러내는 예표와도 같습니다.
🔎 예수회 가족으로 시작된 새로운 삶
발타사르의 독일 학 안에서의 학문적 탐구는 그가 서른 중반이 될 때까지 어쩔 수 없이 중단됩니다. 왜냐하면 발타사르는 1927년 예수회 입회를 위한 이냐시오 영신 수련을 했고, 그를 통해 예수회에 입회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발타사르는 1929년부터 약 2년간의 수련기를 시작으로 1936년 사제품을 받을 때까지 철학과 신학을 공부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발타사르가 가톨릭 교회의 사제가 되기 전에 탐색한 모든 여정은 그만의 독특한 신학적 사색의 길을 마련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됩니다. 발타사르는 그 여정의 모든 열매를 그리스도교 사상 안으로 끌어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무언가 이해하는 최우선의 방법은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을 통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 발타사르가 제시한 ‘미학적 시선’
모든 진실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나옵니다.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 과거로부터 전해진 메시지도 아니고, 철학적 범주 안에서 만들어지지도 않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가 지닌 문화와 그리스도교 사이에 존재하는 상관관계나 그 옳고 그름의 문제도, 20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이해와 가치관을 통해 종교적 전통을 해석하는 문제도 아닙니다.
발타사르의 시선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관점은 철학적 방법을 통해 진리의 기준을 만들어 내는 보수적인 담론으로부터, 과학적 방법이 제시하는 진리의 기준을 만들어 내려는, 신에 대한 담론이 지니는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진보주의적인 자유로운 방법까지 모두 추구합니다.
사실 그의 이러한 신학적 접근은 기존 사상을 주도하던 이들에게는 반감을 일으킬 만한 이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발타사르만의 신학,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한 그만의 방법론인 “신학적 미학”이 되었습니다.
발타사르의 방법론은 교회적이거나 그 전통을 고스란히 이어 내는 접근법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가 접한 문학과 음악, 예술과 모든 작품은 교부들의 신학을 사색하게 하는 연구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발타사르는 이렇게 말합니다.
“문학과 예술은 ‘영spirito’의 우연한 표현들이 아니라,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종교적 표현이다.”
이는 발타사르가 문학과 철학, 신학을 가르는 경계는 없고, 그 학문들이 서로 연결되어 공존할 수 있다고 여겼음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바로 발타사르 신학의 특이점이자 그가 20세기 위대한 신학자이면서도 마치 ‘아웃사이더’처럼 남은 이유입니다.
발타사르에게는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현실적 파악을 인지하는 것이 더욱 중요했습니다. 그는 그 시대가 지닌 ‘현상과 현실적 문제’를 진지한 숙고를 통해 시대의 변화를 감지하고, 이를 뚜렷한 성찰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발타사르에게 이 모든 것, 즉 인간이 지닌 현실 삶의 예술적, 문학적 표현들은 그들의 신념과 세상과 사람의 ‘영’이 지닌 종교적 표현이었고, 이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쓰이는 철학과 신학은 그 경계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 발타사르의 ‘신학적 미학’ 핵심 포인트
발타사르는 문학과 예술을 통해 자신만의 ‘신학적 미학’을 이루었습니다. 그가 이를 통해 성찰하고자 했던 것은 크게 다음의 두 가지 항목으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① 미학적인 성찰은 분명 사람이 누군가를, 또 다른 존재를 만나게 한다는 데 그 힘이 있다. 미학은 ‘계시’의 초월성조차 어떤 의미도 잃지 않은 채 편견 없이 누군가를 만나 고스란히 전달될 수 있는 특별한 접근 방식이다.
② ‘아름다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계명인 ‘사랑’을 구성하는 요소이고, 동시에 그 사랑은 아름다움과 불가분의 관계이다. |
이렇게 발타사르 신학은 ‘미학’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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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