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신비>, 부활을 위해 준비된 죽음

📚서평

<죽음의 신비>, 부활을 위해 준비된 죽음

술마시는토토로

2026. 04. 14
읽음 7

 

인간이 하느님께 등을 돌려 처음에는 원만했던 관계가 전부 틀어졌다.

죽음의 신비_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책은 이렇게 무겁게, 어쩌면 따끔거리는 가시관처럼, 내 머리 위에 깊은 죄책감을 올려놓으며 시작하고 했다. 마치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고는 자신도 놀라 눈을 감아 버리는 어린아이 같은 내 삶에 강제로 눈꺼풀을 올리며, 고개도 돌리지 못하게 하는 듯했다. 시작이 그러했으니, 그 끝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이 어렵다고 느꼈던 것은, 작가의 깊은 통찰을 제대로 읽을 준비가 안된 나의 지적 한계도 있었지만, 자꾸만 거부하고 피하고 싶은 진실에 내 마음이 나의 눈을 가리고, 나의 마음을 닫게 했던 것도 한 이유일 것 같았다.

하지만 캐스리스더에서 사순과 부활 시기에 맞춰 이 책을 골랐을 때는 나름 이유가 있기는 했다

나는 내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에 대해 몇 년 전부터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있었는데, 실은 그 고민의 크기에 비해 내가 찾은 답은 너무나도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형편없는 정도가 아니라 시험 종이 울리 때까지 끙끙대다 결국에는 백지 답안지를 낸 꼴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이었다.

어리석은 나는 그 답을 찾고 싶었다.

죽음은 우리를 추궁하는 가장 두려운 진실이다. 왜냐하면 죽음은 단지 더는 함께할 수 없는 이별의 의미에서만이 아니라 제대로 이해했는지, 대화의 단절은 없었는지, 아니면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 또 다른 차원들을 믿고 받아들이는 그런 사랑을 시도했는지 끈질기게 다그치는 치밀하고 엄격한 재판관과 같기 때문이다."

"[오직 영원성만을 꾸준히 마음에 품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는 허무함에 마음을 빼앗기면 빼앗길수록, 죽음은 그에게 점점 더 무겁고 두렵게 다가온다

죽음의 신비_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언제나 죽음은 도피처이거나 두려운 존재이기만 했었다. 힘든 삶에 대한 원망을 풀어내며 그 책임을 지라는 푸념의 대상이었고, 그럼에도 도저히 내가 감당하지 못하며 매달리는 존재였다. 아마도 내게 죽음은 심판을 받아야 될 순간이며, 얼마 안 되는 가진 것에 대한 박탈의 시간이며, 내 실패를 확인하는 시험대이기만 했던 것 같다.

그리하였으니, 주님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기도로서 대화하려고도, 그리고 그 순간이 영원의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것을 받아들인 적 없는 나는 세속적인 분리, 포기, 단절에만 집착했을 것이다. 무한의 시간을 들였어도 그런 나는 결국 내가 두려워한 죽음의 모습으로만 죽음을 대면한 체 그대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이 삶은 영원의 삶에 대한 그 간절한 노력과 희생을 위한 아주 짧은 준비 기간이었던 모양이었다.

 

죽음이란 속죄의 차원에서 일정 기간 감당해야 할 형벌이 아니라, 새롭게 정진해야 할 삶을 알리는 외침이요, 사라져 버리는 시간 속에서 신비로운 영원의 세계가 놀랍게도 그 손을 뻗는 순간이다.

아주 심오한 의미에서 그것은 하느님께서 친히 건네시는 외마디 진언이자 가르침의 한 요절이다.

죽음의 신비_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분명 나는, 죽음을 속죄의 핑곗거리로 여기고 있었는지 모른다. 죽음 그 자체가 속죄의 완결이며, 나의 죽음은 그것으로 나를 떳떳하게 만들어줄 핑곗거리나 면책의 도구라고 생각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죽음으로 바꾸려 했던 것들을 다시 생각해 보면, 오로지 나를 위한, 그러니까 내 인간적인 안위나 욕망이 그 대가였음을 나는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나는 원래 '해방'이었던 죽음을 나는 형벌로만 느꼈으니, 그저 피해야만 했고, 형벌이었으니 억울하거나 그 대가를 바랐을 것이다. 실은 죽음이 선물이었던 것이다.

인간이 욕심껏 그러나 헛되이 세운 세계가 허물어지는 바로 그 순간 본래의 이름이 '해방'이었음을 드러내는 죽음은 인간 존재 전체를 자유로 이끈다.

죽음의 신비_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나는 이 글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아주 작은 진실의 물결이 나의 발끝에 밀려옴을 느꼈다. 그리고 나의 눈가는 조금씩 시려오기 시작했다. 분명 무언가 실마리를 잡게 된 기쁨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오직 그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내 지난날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웃음이었고, 그 어리석음에 그토록 안간힘을 썼던 나 자신이 불쌍하기도 해서였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그러하리라는 절망 때문이기도 했다.

끝끝내 내가 해방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 순간 내 눈가를 적신 이 눈물의 갈고리에서는 해방되고 싶었다. 이것은 나의 불쾌감만의 문제가 아니라, 원래는 해방이었던, 아니 해방이었던 것을 오해하며 지냈던 스스로가, 드디어 그 해방을 준비하신 분께 고개를 들어 어떻게든 그분께 나의 간절한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껏 나를 옥죄었던 시간과 죄의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할 내 최소한의 의무인 것 같았다.

인간이 고통과 죽음이라는 장애를 스스로 견디어 냄으로써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죽음의 신비_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아마도 나의 끝없은 고통과 시련은 올바른 관계를 거부하는 내게 끊임없이 내어주시는 주님의 손길이었던 모양이었다. 회복할 마음이 없었으니, 회복되지 못한 마음의 상처는 길을 잃고 내 혈관 곳곳을 떠돌며 나를 고통스럽게 했을 것이다. 

내 삶이 보속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나는 부끄럽고 불편하다. 이것은 그러지 못했음에 그러하기도 하고, 그러지 못하고 있음에 그런 것이며, 그러지 못할 것에 또 그러하다.

깨달음이 없는 삶이 이래서 무서운 법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올바른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향해 죽고 주님의 죽음을 기꺼이 뒤따라야 하며, 성자께서 죽음 앞에서 취하신 완전한 모습을 본 받아 그 불안에 오롯이 동참해야 합니다. 자기 죽음을 앞둔 신앙인이 이러한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도록 돕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며, 이렇듯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넘겨받는 순간 죽음의 고통스러운 역할은 조용한 배경음악처럼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죽음의 신비_아드리엔 폰 슈파이어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나는 한 가지, 큰 위안을 하나 받게 되었는데, 그것은 교회라는 주님의 신부가 내 곁에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교회 내의 여러 모순과 부조리를 불편해하는 사람이었지만, 실은 나도 그 모순과 부조리의 한 가운데 있었음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그 의지 끈이 너무나 얇게 헤어져, 힘껏 붙잡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교회는 거룩하며 그 거룩함은 그 모순과 부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 교회를 신부로 맞아들이셨다는 것에 있으며, 그 신부는 나를 주님의 곁으로 이끌 인도자이며 믿음의 울타리가 될 것이었다.

그런 삶으로 맞이하는 죽음의 순간에 저자의 말처럼 조용한 배경음악처럼 그통의 역할은 끝나고 영원한 주님의 손을 잡는 순간이 되기를 바라며, 부활 주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향으로 죽음을 바라보리라 생각했다.


온라인 서점 : yes24  id : empatia
블로그 링크 : https://blog.naver.com/empatia/224251871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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