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지 한 달도 안 된 갓난아이였을 때, 부모님의 신앙 안에서 저는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 당시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해 어떤 모습으로 세례를 받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훗날 어른이 되어 유일하게 저의 세례를 증언해 주는 세례 대장을 찾아봤는데, ‘김요셉’이란 분이 저의 대부님으로 기록되어 있더군요.
주소나 전화번호 하나 없이 달랑 성과 세례명만 남겨진 것을 보고 서울역에서 김 서방을 찾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대부님을 찾는 것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저는 세례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한 번도 제가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의 사랑과 열심한 신앙 교육 덕분에 저는 하느님께서 나의 아버지라는 놀라운 신비,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늘 기억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사춘기를 보내며 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에게 세례를 강요했냐고 치기 어린 마음으로 부모님을 원망한 적도 있지만, 저는 한 번도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세례를 받으셨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저처럼 유아세례를 받으신 경우라면, 기억을 통해 그때의 모습을 떠올리기 어렵겠지만, 성인이 되어 세례를 받으신 분들은 분명 또렷하게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전례력으로 주님 세례 축일이 되면 로마에 계신 교황님께서 직접 신자들에게 세례를 주는 관례가 있습니다. 2018년 1월 7일 주님 세례 축일에, 교황님께서는 시스티나 경당에서 교황청 직원의 자녀 34명에게 세례를 베푸셨는데, 이때 전 세계 신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께서 진실에 마음의 눈을 뜨게 해 준 성령을 주신 날이 세례일”이라 강조하시며, “성령이라는 주님의 선물을 받은 세례일을 기억하고 기념하자”고 당부하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생일은 중요하게 여기며 기념하는데,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로 새롭게 태어난 우리의 세례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신앙을 시작하는 문이며, 매 순간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이 놀라운 성사를 우리가 너무 가볍게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종교개혁자로 기억되는 마르틴 루터는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 신부로서 사실 매우 열정적으로 신앙을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세례의 중요성을 잊지 않기 위해 책상 위에 “나는 세례받은 사람이다Ich bin getauft”라고 써놓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은총에 대해 의심하게 되거나 느닷없이 사탄의 유혹에 휩싸일 때마다 이 문구를 큰 소리로 외치며 유혹을 이겨 내고자 노력했다고 합니다. 자신은 하느님에게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말이지요.
여러분에게 세례는 무엇인가요? 세례 때 주님께 했던 서약을 충실히 지키고 계십니까? 그 서약이 지니는 중대한 의미를 알고 계시는지요? 단지 파스카 성야 때, 의무적으로 갱신하는 세례 서약 때만이 아니라, 일상의 삶 속에서 우리가 세례 때의 서약과 그 의미를 새롭게 기억하고 살아간다면, 하느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은총을 이미 우리가 충만하게 받았음을 깨달을 수 있고, 또 더욱 굳건한 믿음 안에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어 40일 동안 지상에 머무시다가 승천하셨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온 세상에 가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마태 28,19)를 주라고 사명을 맡기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멀리 인도 남부와 스페인, 그리고 당시 세상의 중심이라 여겨지던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었다고 성경과 교회 전승은 증언합니다. 물론 초기 교회에는 지금 우리가 받는 세례 예식과는 달리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물로써 세례를 베푸는 간략한 형태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례를 준비시키고 또 세례를 확증하는 여러 다른 예식이 함께 어우러져 지금의 형태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여기서 초기 교회에서 어떻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또 각각의 예식들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세례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4세기 예루살렘의 주교로 사목했던 키릴루스(Cyrillus, 313-387) 성인이 새 신자들에게 예식의 신비들을 설명했던 강론을 살펴보면,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분명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가 세례를 베풀기 위해 사용하는 《어른 입교 예식》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주교님들이 초기 교회의 입문 성사 예식들을 현대적으로 복원하라는 요청에 따라 마련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키릴루스 주교가 남긴 강론들에 따르면, 예루살렘의 세례성사의 예식들은 크게 세례 이전, 세례 예식, 그리고 세례 이후의 예식으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세례 이전의 예식들을 살펴봅시다. 세례성사는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파스카 성야 때 베풀어졌는데, 부활의 전날 밤, 세례 후보자들과 전례 봉사자들은 ‘아나스타시스(Anastasis, 그리스어로 부활이라는 뜻)’의 남쪽에 위치한 세례당 현관에 모여 ‘끊어 버림’으로 예식에 참여합니다. 이곳은 324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인 헬레나 성녀가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다가 예수님께서 처형당하신 골고타와 무덤을 발견한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명령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묻히셨다가 부활하신 그 자리에 건설된 건물로, 지금까지도 전 세계 많은 그리스도인이 성지순례를 가는 거룩한 곳입니다. 이 거룩한 경당의 세례당 현관에 모인 세례 후보자들은 밤의 어두움이 펼쳐진 서쪽을 바라보고 서서 침묵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주례자의 안내에 따라, 그들은 서쪽을 향해 두 손을 펼치고 선언합니다.
“사탄아, 나는 너를, 너의 모든 행실, 너의 모든 허영과 예식을 끊어 버린다!”
당시 고대 사회 안에서 해가 지는 서쪽은 어두움의 지배자인 사탄이 머무는 장소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세례 후보자들은 세례라는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결합 이전에 자신이 처해 있던 상태, 곧 사탄에 짓눌려 살았던 삶을 끊어 버리겠다고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이는 창세기의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고 지은 원죄로 인해 모든 인간이 사탄의 그늘에 놓여 있던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겠다는 결심을 드러내는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선언과 함께 세례 후보자는 동쪽으로 ‘돌아서’, 두 팔을 펼치고 “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믿으며, 또한 회개를 위한 유일한 세례를 믿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 서쪽의 일몰이 어두움이 빛을 집어삼키는 사탄의 상징적인 행위라면, 동쪽의 일출은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을 상징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 빛은 세상의 참된 빛이신 그리스도이시며 일출은 그리스도께서 사탄을 몰아내시는 상징적인 모습이라 간주되었습니다.
동쪽은 그리스도께서 계시는 곳이며, 동시에 마지막 날에 그분께서 다시 오실 곳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초기 교회 신자들은 동쪽을 향해 기도를 바쳤고, 교회 건축물 역시 ‘서쪽’을 입구로 하여 제단과 후진(abside, 後陣)이 ‘동쪽’을 향해 건설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돌아섬’이라는 전례적 행위의 의미입니다. ‘돌아섬’은 이미 어떠한 것, 또는 어떠한 상태‘로부터’ 벗어나 그와는 상반되는 것, 또는 상태‘로’ 옮겨 가는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키릴루스는 이러한 ‘돌아섬’을 통해 세례 후보자는 사탄의 종살이‘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께‘로’ 돌아서는 파기할 수 없는 회개를 표현하는 것이라 설명합니다. 즉 사탄과의 맺었던 모든 옛 계약을 파기하고 이제는 그리스도께 완전히 귀의하여 그분께만 충성을 다할 것을 서약하는 장엄한 선언이 ‘돌아섬’이라는 동작을 통해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를 드러내는 상징적 전례 예식을 거행한 이후, 세례 후보자들은 세례당으로 들어가 세례성사의 핵심 예식인 세례를 받게 됩니다.
4세기에 예루살렘에서 거행된 끊어 버림과 신앙 고백 예식은 우리가 세례성사 때 ‘끊어 버립니다’와 ‘믿습니다’라고 서약한 행위가 얼마나 장엄하고 거룩한 행위인지 말해 줍니다. 끊어 버리겠다는 서약은 과거에 하느님이 아닌 사탄, 곧 교묘히 우리 삶에 녹아들어 있는 현대적 우상들을 섬기며 그 우상에 짓눌리며 살았던 모든 모습을 끊어 버리겠다는 것이며, 이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돌아섬’의 전례적 행위를 통해 표현하는 것입니다. 또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은 단순히 그분께서 계시하신 진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가 아니라, 나의 전 존재를 그리스도께 내어 맡기겠다는 결심을 내포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받은 세례 예식은 이유 없이 아무렇게나 구성된 것이 아니라, 세례 이전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지는 완전한 회개를 표현하는 것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