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이름을 들어본 책이 있을 것이다. 바로 《신학 대전》이다. 이 위대한 대작을 쓴 성인이자 교회 학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로 손꼽히는 토마스 아퀴나스를 만나보자.
⚬이름: 토마스 아퀴나스
⚬활동 시기: 1224/1225-1274년
⚬신분: 사제, 신학자, 교회 학자
귀족 가문 출신에서 수도자의 길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1225년경 이탈리아 아퀴노의 로카세카 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황제와 연이 닿을 만큼 명망 높은 귀족이었다. 그러나 토마스는 이러한 세속적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하느님께 자신을 봉헌하기로 결심했다. 다섯 살에 몬테 카시노 수도원으로 가게 된 토마스는 학문과 덕행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나폴리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하느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 그 후 토마스는 도미니코 수도회에 들어가 수도자로 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이 결정에 가족들이 극심하게 반대했고, 급기야 토마스의 형들은 그를 가둬놓고 부정한 여자를 이용해 유혹하려고 했다. 하지만 토마스는 이를 물리쳤고 성모 마리아의 보호를 통해 평생 동정을 지킬 수 있었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룬 《신학 대전》
토마스는 독일 쾰른에서 알베르토 성인의 제자로서 학문을 익혔고, 이후 파리 대학에서도 공부하며 신학자로서의 명성을 쌓아 갔다. 그의 스승과 동료들은 처음에는 토마스를 과묵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그의 예리한 지성과 탁월한 덕성은 이내 모든 이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파리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토마스는 이후 유럽 여러 도시에서 가르치며 학문적, 영적 영향력을 확장했다. 특히 그가 9년에 걸쳐 집필한 《신학 대전》(Summa Theologica)은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이룬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이 위대한 작품을 쓴 토마스에게 하루는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토마스야, 너는 나에 대해 참 잘 썼구나. 그 보수로 무엇을 받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러자 토마스는 “주님, 당신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가장 뛰어나면서도 겸손했던 교회 학자
1273년, 토마스는 신비 체험을 한 후 《신학 대전》의 집필을 멈추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본 것에 비하면 그동안 쓴 모든 것이 유치하게 느껴집니다.” 이후 그는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이 소집한 리옹 공의회에 참석하러 가던 중 병에 걸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서 선종했다. 당시 그의 나이 48세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신의 명예와 세속적 욕망을 내려놓고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며 살았다. 바오로 사도의 말처럼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1코린 10,31 참조) 했던 것이다. 특히 그는 뛰어난 지성을 지녔지만 평생 겸손했고 자신이 가진 재능을 하느님을 위해 바쳤다. 우리도 토마스 아퀴나스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재능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쓸 수 있기를 간절히 청해 보자.
* 이 콘텐츠는 《가톨릭 성인전》 일부를 재구성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