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창세 18,23)

성경 이야기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창세 18,23)

주님께서 의로운 이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길 원하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2025. 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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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서 세상 모든 것을 삼킬 듯이 지글지글 타오르는 세찬 불길, 곳곳에서 들리는 절규하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하면 쉽게 떠올리는 이미지입니다. 이 도시들은 죄악으로 가득 차 있었고, 결국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불과 유황으로 멸망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이름은 사악함과 타락으로 멸망된 도시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극적인 이야기의 시작은 조금 다릅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타락과 멸망을 담은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이 주님께 소돔을 위해 간구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낯선 이들의 방문

 

아브라함의 절실한 간구 이야기는 주님의 신비로운 개입이 일어나는 두 개의 이야기 사이에 있습니다. 첫 번째는 주님의 천사들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찾아온 이야기(창세 18,1-15)이고 두 번째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입니다(창세 19,1-29).

 

이 두 이야기는 모두 낯선 사람들의 방문으로 시작됩니다. 낯선 사람의 방문은 이들을 맞이하는 사람에게 매우 중요하고 결정적인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18장의 아브라함과 19장의 소돔 사람들의 반응은 아주 극과 극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들을 따뜻하게 환대했고, 소돔 사람들은 폭력과 적대로 맞섰습니다.

 

이 낯선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임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아이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으로 이루어집니다(18,10). 다른 임무는 끝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19,1-28에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으로 일어납니다. , 주님(과 그의 사자들)의 경외로운 임무는 시작과 끝을 모두 일으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독특한 능력입니다(신명 32,39; 1사무 2,6; 이사 45,7 참조). 시작과 끝의 시간은 삶의 신비에서 가장 시급하고 어려운 신학적 질문을 해야 할 때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주님께 중요한 신학적 질문을 던집니다.

 


 

환대와 적대

 

이사악의 임박한 탄생을 알리는 주님의 세 사자들을 아브라함이 환대하는 장면은 히브리어 성경에서 가장 뛰어난 환대의 사례입니다(18,1-15). 주님은 세 사람을 통해 아브라함을 방문합니다. 18,1에서 방문하신 주님이 갑자기 세 사람(그들)”로 바뀌는 것(18,2 이하)은 우리에게 당혹감을 안겨 줍니다. 하지만 이 방문의 주체로 단수 명사인 주님과 복수 대명사 그들을 번갈아 사용하는 것은 아브라함에 대한 주님의 방문이 인간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의 환대는 간절함과 관대함이 특징입니다. 아브라함은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지만, 낯선 이들을 보고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립니다”(18,2). 낯선 이들을 맞이하러 달려 나가는 것은 그들에게 필요한 환대를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강조합니다. 그는 방문객들에게 그와 함께 머물러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합니다(18,3). 아브라함은 빵, 엉긴 젖과 우유, 송아지 고기를 그들에게 제공합니다(18,6-8). 아브라함의 환대가 이상적이고 합당하다는 것은 그가 서둘러 식사를 준비하고 후하게 음식을 제공한 데서 알 수가 있습니다.

 

환대를 받은 방문객은 아브라함에게 보상을 약속합니다. “내년 이때에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18,10)라는 약속은 나이가 많은 아브라함과 사라에 입장에서 보면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는 약속은 이미 반복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창세 12,1-3; 15,1-6; 16,11; 17,15-21) 창세기 18장은 아브라함의 환대가 이사악이라는 주님의 선물과 연관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반면, 창세기 19장에서 소돔 사람들은 낯선 이들에게 불의와 사악함으로 응답합니다. 롯이 적절한 응대로 두 천사를 맞이했지만, 소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이 낯선 이들에게 환대를 베풀지 않습니다. “성읍의 사내들이 젊은이부터 늙은이까지 온통 사방에서 몰려와 롯의 집을 에워쌌다.”(19,4)라는 것은 소돔의 모든 이가 롯의 집 밖에 모여서 사악한 행동을 할 준비를 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전통적인 환대의 관습은 낯선 사람들에 대한 그들의 적대감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낯선 이들에 대한 소돔 사람들의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대응은 당혹스럽습니다. 방문객들에 대한 환대는 그 마을의 책임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롯만이 그 책임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소돔 사람들이 환대라는 공동체적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은 궁극적으로 소돔의 파괴를 정당화하고 그 공동체의 가장 약한 구성원인 롯과 그의 가족들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습니다(19,16.29).

 


 

아브라함, 주님께 공정과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다

 

소돔 사람들의 이러한 죄악은 18,20-21에서 암시됩니다. 소돔의 무거운 죄에 대해 정확한 내용은 18장에서는 아직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원성”(울부짖음)이라는 단어가 반복해서 사용됨으로써 소돔 사람들이 사회 정의를 남용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원성(울부짖음)”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단어는 정의와 공정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는 공동체에서 사회적인 약자들이 울부짖는 고통의 외침을 의미합니다. 놀랍게도 탈출기 22,20-23에서 같은 단어가 이스라엘인들이 외국인이나 이방인을 억압하거나 학대하면 주님께서 억압받은 이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말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낯선 방문객들이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주님께서 갑자기 독백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18,17-19)

 

아브라함은 주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된 축복받고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은 주님께 대범한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외침을 확인하기 위해 두 도시의 상황을 점검하려고 하십니다(18,21). 그리고 두 사람이 소돔으로 가고,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함께 계십니다(18,22).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18,23-25)

 

이제 아브라함이 주님 앞에서 공정과 정의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아브라함의 질문은 아주 대담합니다. 그는 사악한 세상에서 몇몇 의로운 사람들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를 질문합니다. 의인들이 죄인들과 함께 쓸려버린다면 그것이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아브라함은 온 세상의 심판자인 주님께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18,25). 하나는 온 세상을 쓸어버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수의 의로운 자들 때문에 죄 많은 세상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주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는 숫자 10으로 갑작스럽게 끝나 버립니다(18,32). 우리는 숫자에 집중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문학적 기법이므로 문자 그대로의 숫자를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이 대화는 공정과 정의의 힘이 악을 이긴다는 요점이 확립되면서 중단됩니다.

 

18장에서 주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는 확고한 결론에 도달하기보다는 여전히 추구해야 할 새로운 질문을 제기합니다. 전통적인 생각에 의하면, 몇몇 죄 많은 사람은 공동체 전체를 파괴할 수 있지만, 무죄의 이들은 오직 자신만을 구할 힘만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위험하고 도발적인 아브라함의 질문은 주님께서 지금 고려해야 할 또 다른 가능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무고한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능력과 죄의 폭력성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가능성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주장의 결과는 죄 많은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극소수의 의로운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주님의 능력과 거룩함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도덕주의에 뿌리를 둔 심판하는 주님에 대한 공포 속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과 아브라함의 대화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립니다. 주님은 우리 모두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적극적으로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순종하지 않는 자들보다 순종하는 이들에게 더 주의를 기울이십니다.

 

결국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했지만, 아브라함의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죄 많은 세상에서 의로운 몇몇 사람들의 힘은 얼마나 클까요?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에게 심판의 길을 열어 주실까요? 아니면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실까요? 주님께서는 여전히 의로운 이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길 원하신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Profile
교황청립 그레고리오 대학교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고 있습니다. 성경 공부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만나는 길이기도 하지만, 내 자신이 누구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게 해 주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아가게 합니다. 저에게 성경은 무한히 펼쳐진 우주와 같습니다. 그 안에서 끊임없는 질문을 만나며, 그 모든 답이 하나로 이어지는 신비로운 여정을 떠나는 듯한 기분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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