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부터 잦은 병치레, 밀려드는 여러 가지 일 등 나 자신을 둘러싼 상황들을 혼자서는 컨트롤하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던 나날들이 있었습니다. 잠시 쉬어가지 않고는 도저히 못 배기겠다 싶을 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청년성서모임 마르코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벌써 시간이 꽤 흘렀지만, 그 시간 속에 넘치도록 받았던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아직 연수를 다녀오지 않은 분들을 위해 자세한 내용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마르코 연수는 마르코 복음서를 공부하며 알게 된 예수님의 생애를 기도와 다양한 프로그램 안에서 다시 바라보는 기회를 갖습니다. 마르코를 비롯해 모든 복음서에서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부활 사건이 이어지는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잘 아실 겁니다(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기도 하지요).
오늘은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파스카 신비에 관하여 묵상하기 좋은 이 책은 마르코 연수를 통해 느꼈던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의미, 그분의 사랑을 다시 떠올리게 하며, 세상에 파견된 내가 어떤 태도로 살아가면 좋을지 묵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큰 힘이 되었습니다. 특히 복음 속 말씀을 조금 더 깊은 차원에서 들여다보며, 예수님의 죽음을 오늘의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해 볼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았습니다.
죽음을 다루는 신학자 발타사르
먼저 이 책의 저자가 한스 우르스 폰 발타사르(1905~1988)라는 점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발타사르는 현대 신학의 거장, 20세기의 위대한 신학자라고 불릴 정도로 자신의 사상을 활발하고도 탁월하게 전개한 학자입니다. 최근 이 신학자의 책이 지속해서 소개되는 출판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데요. 여전히 그의 사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움직임으로 보입니다.
저자가 신학자로서 명성이 높은 만큼 이 책이 너무 어려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우려한 만큼 까다롭게 읽히는 책은 아니라 다행이었습니다.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는 어쩌면 단순합니다. 제목처럼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굉장히 심도 있게 내용을 풀어내지요. 발타사르는 인간이 죽음을 향해 살아갈 운명이지만, 유한한 삶 속에서도 불멸을 바라며 모순을 끌어안고 사는 존재인데, 이처럼 인간이 간직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 죽음을 바라봐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이를 위해 인간적 차원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성경 속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며 그분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비롯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 너무 많은 내용을 알리면 이 얇은 책의 상당 부분을 노출하여 기대치를 낮출지도 몰라 말을 줄이지만, 이 책의 백미는 저자가 전개하는 죽음과 삶에 대한 논리적 흐름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심오한 주제를 다뤄도 이를 깔끔하고 명료하게 풀어내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였겠다고 느꼈습니다. 특히 이 짧은 문장만으로도 그리스도인이 살아가야 할 삶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 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세례의 죽음에서 떠오르는 가운데, 죽음으로부터 시작해서 성체적으로 살아가도록 파견된다.
그리고 다시 죽음을 향해 살아가도록 파견된다.”
_《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 104쪽
진정한 부활을 맞이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깊은 사랑
예수님께서는 세례받은 우리를 ‘죽음의 삶’에서 건져 내시어 영원한 삶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성체성사를 통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며 우리를 먹이시고 우리가 그 힘을 통해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부활의 삶’을 전하며 살도록 사명을 주시지요. 우리는 죽음을 향해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이 죽음이 언제나 우리를 하느님께 연결하는 부활과 이어진다는 점을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성경, 특히 신약 성경을 공부하거나 통독하거나 필사하는 분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를 꼭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래도 발타사르가 신학자라는 점에서 이 책을 이해하는 데 다소 장벽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순 시기를 보내며 죽음을 지나 진정한 부활을 맞이하도록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깊은 사랑을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성부와 인류에게 사랑으로 봉사하기 위해 제정하신 성체성사는 그 안에 우리의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도 이러한 죽음을 통해 그분의 사랑의 봉사에 협력하도록 초대한다.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인해, 더 나아가 우리를 위해, 우리를 통해 흘려진 그분의 피를 마신다.
만일 우리가 죽음에 직면해서 두려워 떤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가치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에 앞서 죽음의 의미를 바꾸기 위해 친히 죽음을 끌어안으신 주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_《발타사르, 죽음의 신비를 묵상하다》, 53~55쪽
by 효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