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성경 이야기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

그가 그분을 만난 뒤로 -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3)

다들 잘 아는 것처럼 이 여인은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지만, 현재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이 아니다(요한 4,17-18).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제게는 남편다운 남편이 없습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다 하니 이 여인이 문란한 생활을 하며 평생 살아왔다고 단정 지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는 그렇게 간단하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당시는 여성의 인권이 제대로 확립하기 전이었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여인들은 슬프게도 남자의 소유물 취급을 받았던 터라, 경제적 수입을 전적으로 남편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독자적으로 직업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행여나 남편이 아내를 버린다면 아내는 다른 사람과 혼인을 다시 하거나 최악의 경우, 거리의 여인이 되어야 생계를 이어 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여인은 문란한 품성을 갖고 있어서 남편을 다섯이나 만들고, 현재도 다른 남자와 지내는 것일까? 그녀라고 훌륭한 남자를 만나 평생 그만을 바라보며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남편다운 남편이 없었다.

 

다섯 명의 남편을 두고 그마저 헤어져 여섯 번째 남자와 살던 그녀는 왜 혼인하지 않았을까? 아마 더 이상 혼인하기가 두려웠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녀의 속사정을 알지 못하고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손가락질하기 바빴을지 모른다. 예수님 덕분에 더는 물을 길으러 나오지 않아도 되겠다는 발언이 이 여인의 처지를 모두 알려 준다.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요한 4,17)

 

그녀는 남편이 없다. 함께 사는 남자도 남편 같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데 생전 처음 본 분이 자신의 과거를 다 안다는 사실에 그녀는놀라 이렇게 말한다.

 

선생님, 이제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시군요.”(요한 4,19)

 

예수님을 처음에는 유다인으로, 이후에는 선생님으로 불렀던 이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더 거룩한 호칭인 예언자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이러한 호칭의 변화는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마음의 움직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여인은 유다인에게 냉대받는 사마리아인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저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생님네는 예배를 드려야 하는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말합니다.”(요한 4,20)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예언자로 여기면서, 대화 주제도 점점 영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마실 물을 찾았던 여인은 자기도 모르게 주님께 드리는 예배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점차 관심사가 우물물에서 예배로, 곧 육적인 것에서 영적인 것으로 옮아가는 것이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특정한 물리적 장소가 아닌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는 말씀을 하신다.

 

여인아,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요한 4,21)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이들을 찾으신다.”(요한 4,23)

 

이 산(그리짐산)도 아닌, 예루살렘도 아닌 곳에서,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린다는 말씀은 차별과 억압, 그리고 알게 모르게 죄책감으로 상처받은 사마리아인에게는 하나의 복음이 될 것이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의 이 신비한 말씀에 점차 몰입하여 예수님께 이 호칭을 말씀드린다.

 

저는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것을 압니다. 그분께서 오시면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시겠지요.”(요한 4,25)

 

유다 사람 -> 선생님 -> 예언자 -> 그리스도, 메시아.

예수님을 유다인, 선생님, 예언자라고 불렀던 사마리아 여인은, 아직 명확히 인식하지 못했을지라도 그리스도라고도 하는 메시아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여인은 예수님을 거룩함 그 자체이신 예수님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지체 없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사마리아 여인에게 당신을 명확히 드러내신다.

 

너와 말하고 있는 내가 바로 그 사람이다.”(요한 4,26)

 

이 표현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그 말씀을 연상시킨다.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탈출 3,14)

 

모두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낀 여인에게 주님의 계시가 직접 주어졌다. 여인은 넋이 나가 물동이를 놓아두고 마을로 달려간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고을로 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힌 사람이 있습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실까요?’”(요한 4,28-29)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놓아두고 마을로 달려간 장면에는 매우 심오한 상징이 담겨 있다. 혼자 덩그러니 놓인 물동이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녀는 단순히 정신적 놀라움에 사로잡혀서 가지고 온 물건을 잊어버리고 간 것일까?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잊고 있었던 영적인 감각을 되찾고, 이를 통해 외로운 자신의 처지, 하루하루를 물동이에만 의존했던 제 희망 없는 삶과 결별한 것이다. 그녀는 곧바로 자신이 피해 왔던, 자신을 두고 수군거렸던 그들을 향해 달려가서 직접 예수님을 알린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이제 혼자 물을 길으러 나오지 않아도 된 셈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고을에서 나와 예수님께 모여 왔다. 그러는 동안 제자들은 예수님께 스승님, 잡수십시오.’ 하고 권하였다.”(요한 4,30-31)

 

제자들은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가져왔지만, 사마리아 여인은 마을로 가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는 사람들을 데려왔다. 모두가 무시하던 이 여인은 오히려 니코데모보다, 당시 곁에 있던 제자들보다 더 훌륭하게 사도직을 수행한 셈이다.

 

그 고을에 사는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 여자가 저분은 제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혔습니다.’ 하고 증언하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요한 4,39)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머무르시기를 청하자, 그분께서는 거기에서 이틀을 머무르셨다.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씀을 듣고 믿게 되었다.”(요한 4,40-41)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면만을 보고 그분을 따르는 것은 요한 복음서 안에서는 온전한 믿음이 아니다. 그분께 진정한 믿음을 가지려면 그분 가까이에 오래 머물며 그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놀랍게도 이는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갈 때와 매우 흡사하다. 필립보는 나타나엘에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이 예수님이심을 증언하며, 사마리아 여인처럼 그분을 다른 이에게 알린다(1,45). 이에 나타나엘은 처음에는 의심하였으나, 신비롭게도 자신의 과거를 아시는 예수님께 신앙을 고백한다(1,49).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며 나타나엘이 당신과 더욱 오래 머물러야 함을 간접적으로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50)

 

우리도 진정한 신앙을 가지려면 그분 안에 자주 머물러야 한다. 개인적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통로인 성체성사, 여러 성사들과 교회 활동 안에서 그분을 계속 체험해야 하는 것이다.

 

처음에 사마리아 여인이 자기에게 한 일을 알아맞혔다는 증언을 듣고 예수님께 달려온 사람들은, 그분 가까이에서 이틀을 머무르면서 그분을 진정으로 믿게 되었다. 이는 사마리아인들이 한 말 그대로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제 당신이 한 말 때문이 아니오. 우리가 직접 듣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이심을 알게 되었소.”(요한 4,42)

 

이것이 바로 이 이야기의 결론이며,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을 찾아가셔야 하는 이유다.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개인적인 고립에서 벗어나 다시금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게 되고, 사마리아인도 집단적 고립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중심으로 유다인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할 것이다. 그녀가 겪은 목마름은 단순한 육체적 목마름이 아니라, 함께할 이웃에 대한 목마름, 더 나아가 하느님에 대한 목마름이었다.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하느님, 제 영혼이 당신을

이토록 그리워합니다.

제 영혼이 하느님을,

제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합니다.

그 하느님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올 수 있겠습니까? (시편 42,2-3)

 

사마리아 여인은 그분을 만난 이날 이후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그녀는 예수님께 청했던 생명의 물을 얻었을까? 이후 요한 복음서에서 그녀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 그 이야기는 우리가 채워 나가야 한다. 묵상으로든, 우리의 삶으로든.

 

 

Profile
인천교구 사제. 현재 로마에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담긴 메시지를 연구하는 것이 제 주된 일이지만, 그것을 넘어 교회 안에는 세속에서 찾을 수 없는 사랑과 배려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능한,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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