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당시 유다인 랍비들은 여인과 소통하는 것을 금기시했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라 할지라도 집 안이 아닌 밖에서는 눈길조차 주지 않을 정도였다. 일례로 랍비들은 여인들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길을 걸으면서도 고개를 숙이며 율법을 읽었고, 때문에 앞을 못 보아 머리를 부딪쳐 상처가 나면 그것을 되레 공적인 명예로 여기기도 하였다. 그런 사회의 유다인이라면 이방인 여인은 사실상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먼저 말을 건네신 것이다. 그것도 그녀가 쓰던 두레박을 쓰겠다 하시면서…….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요한 4,9)
여기에서 ‘상종하지 않았다’라고 번역된 희랍어 표현(οὐ γὰρ συγχρῶνται)은 본래 ‘무엇인가 같이 쓰지 않다’라는 의미다. 어떤 사람을 너무나 멀리한 나머지, 그 사람의 물건조차 같이 쓰려고 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더군다나 여인을 바라보는 것조차 피하던 유다인 입장에서, 물을 달라고 청하며 사마리아 여인이 쓰던 두레박을 쓴다는 것은 철저한 정결법 위반이었다.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요한 4,9)
예수님을 처음 본 사마리아 여인은 그분을 ‘유다 사람’이라고 칭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말이 이해가 안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동족인 사마리아인조차 항상 수군거리고 자신을 피해 왔는데, 처음 보는 어느 유다인이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다. 이 여인은 순간 예수님께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여기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나온 시간을 보자. 그녀는 물을 길으러 정오 무렵에 나왔다. 우리는 이미 이 시간을 니코데모의 상황과 비교해 보았지만, 여기에는 또 다른 속사정이 있을지 모른다.
보통 사람들이 물을 뜨러 오는 시간은 해가 뜨기 전의 서늘한 아침이나, 하루 일과가 끝나고 밥하기 전인 시원한 저녁 어스름일 것이다. 정오는 매우 덥기 때문에 더위를 피해 집 안에 있을 시간이다. 우리는 이 시간에 사마리아 여인이 나온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인 때를 피하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그녀에게는 사람들의 눈총과 수군거림, 손가락질보다 한낮의 더위가 더 견디기 쉬웠을지 모른다.
의아해하며 되묻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생명의 물)을 주었을 것이다.”(요한 4,1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 한순간에 청하는 사람과 도움을 주는 사람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여인에게 물을 청하셨지만, 오히려 더 심각한 목마름, 곧 영적 목마름, 사랑의 목마름을 겪는 이는 다름 아닌 이 여인임을 아신다. 이 말을 들은 여인은 더는 예수님을 유다인이라고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요한 4,11)
여인은 자신이 대화하는 분이 분명 자기가 알던 보통 유다인과는 다른 분임을 직감한 것이다. 아직은 그분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물을 물리적 물인 생수로 혼동하는 듯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분명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더욱 자세히 생명의 물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요한 4,13-14)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 말씀에 반응한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요한 4,15)
한낮의 더위와 싸우며 이곳에 와야 하는 고통, 그리고 그 무엇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매번 물을 뜨러 오던 설움이 묻어나오는 발언이다. 여인이 어떠한 얼굴로 예수님께 이러한 청을 드렸을지 머릿속으로 그려 보면, 그녀의 아픔을 더욱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은 생명의 물을 물리적 물로 착각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주제를 주시며 그녀가 진정 아파하는 곳을 살펴보도록 초대하신다.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이리 함께 오너라.”(요한 4,16)
“저는 남편이 없습니다.”(요한 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