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만약 일기 쓰는 어른이 된다면

영성과 신심

우리가 만약 일기 쓰는 어른이 된다면

‘지금 여기’를 살게 하는 기록의 힘

2025. 11. 07
읽음 79

7

6

 

우리 집 아이들을 보면, 초등 저학년 학생에게 일기 쓰기는 가장 피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다. 2학년인 둘째가 학교 숙제로 일기를 쓸 때마다 4학년 첫째는 그 고생을 내가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동생 등을 토닥이며 지나가고, 1학년 셋째는 겁에 질린 말투로 내게 묻는다.

 

엄마, 나도 2학년 되면 일기 써야 해?”

 

둘째가 쓰는 일기장은 내지가 원고지인데 한 쪽에 쓸 수 있는 글자가 100자가 채 되지 않는다. 서너 문장을 쓰면 벌써 한 페이지가 꽉 찬다. 고작 그 정도 쓴다고 팔이 아플 리도 없고, 100자 정도면 아이가 평소 나에게 조잘대는 말의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 분량인데, 아이들은 왜 이렇게 일기 쓰기를 싫어할까. 일기 쓰기를 싫어하던 어린이는 자라서 일기 쓰기를 싫어하는 어른이 될까? 과연 일기 쓰기는 모두 피하고 싶어 하는 일일까.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일기 숙제가 없어지지만, 그럼에도 계속해서 일기를 쓰는 사람들이 있다. 기록의 힘을 믿고 경험한 사람들일 것이다. 기억은 사라지지만 기록은 사라지지 않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 쌓여 진실에 다가가는 이정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이다.

 


 

일기 쓰기의 두 가지 방법

 

글을 쓰고 싶은데 뭘 써야 할지 모를 때 일기는 좋은 시작점이 된다. 내가 진행하던 글쓰기 수업 <함께 쓰는 기쁨>의 첫 시간에서 나는 수강생들에게 한 주간 일기를 써 보자고 제안했다. 일기 쓸 때 지켜야 할 것으로 두 가지를 강조했는데, 하나는 ‘~했음’, ‘~이라는 표현 대신 종결형 어미를 사용해서 문장을 완성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책하는 내용을 쓰지 않는 것이었다.

 

몇 문장 되지 않는 짧은 글이라도 종결형 어미를 써서 문장을 완성하면 글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단편적인 사실을 나열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논리적인 흐름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자책하는 내용을 일기에 쓰지 않는 것은 계속 쓰기 위한 원동력을 갖기 위해서다. 일기를 쓰겠다는 결심이 며칠 만에 흐지부지되는 이유 대부분이 일기에서 나의 못난 점을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돌아보고 반성하는 일은 성장하는 데 있어 꼭 필요한 과정이지만, 그걸 글로 매일 남기는 건 자학에 가깝다. 자기방어 기제가 발동하면 일기 쓰기를 멀리하게 된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나의 못난 점을 굳이 들추지 않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반성하는 건 기록하는 데 익숙해지면 그때 하자고.

 

한편, 둘째의 담임 선생님이 일기 쓰기 숙제에서 강조한 것도 두 가지였다.

 

첫째, ‘나는~’으로 시작하지 않기.

둘째, ‘재밌었다쓰지 않기.

 

아이들은 일기 소재로 재밌는 일부터 떠올리곤 하는데, 일기에 재밌다는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니 난감한 듯했다. 둘째는 동생이랑 같이 물총 싸움한 일을 일기장에 쓰면서 재밌다는 말 대신에 뭐라고 쓸지 고민하다가 시간이 빨리 갔다고 적었다.

 

습관적으로 쓰던 말을 다르게 바꿔 보는 것도 쉽지 않지만, 그보다 더 어려운 순간은 쓸 만한 일이 없을 때다. 둘째의 일기 숙제는 매주 화요일에 제출하기로 되어 있다. 주말에 가족 나들이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낸 이야기를 글로 옮겨 보라는 선생님의 배려일 것이다. 둘째는 토요일 오후부터 일기에 뭐 쓰지 고민하면서 즐거운 일이 생기길 기다린다. 일기에 적을 만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으면 화요일 아침까지 일기 쓰기를 미루다가 학교 가기 직전에 울며 겨자 먹기로 쥐어짜듯 쓴다. 신기한 건, 도무지 즐거운 일이 없다고 생각했더라도 일단 일기를 쓰고 나면 그럭저럭 재미난 날을 보냈구나.’ 하고 여기게 된다는 거다. 그렇게 해서 둘째의 일기장은 보물 상자가 된다.

 


 

삶과 세상을 바꾸는 글쓰기

 

어린이가 일기 글감을 엄선하는 것과 같이 어른도 일기로 쓸 내용을 엄선하는데 방향은 사뭇 다르다. 재밌는 일보다는 주로 후회와 반성. 혹은 이루고 싶은 소망을 되새기기도 한다. 어떤 어른에게 일기는 자기 계발의 수단이다. 만약 당신이 일기를 성실히 쓰고자 하나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다면, 일기장에 대고 고해성사 하는 습관을 멈춰 보길 바란다. 오늘의 의미가 무엇인지, 삶의 교훈을 발견하지 못해도 괜찮다. 교훈을 발견하려고 하지 않으면 일기 쓰기는 놀이가 된다.

 

일기에 쓸 말이 없다고 난감해하는 수강생들에게는 일지를 써 보라고 한다. 일기가 개인의 내면의 기록이라면 일지는 객관적인 사실의 기록이라 어떤 분들은 일지를 일기보다 더 편안하게 느낀다. 직업과 관련하여 그날 한 일을 기록하는 것도 좋고 키우는 식물이 언제 어떤 잎을 틔웠는지 적어도 좋다. ‘이런 기록이 다 무슨 소용이지?’ 하는 회의감이 들 때에도 꿋꿋이 기록하는 게 중요하다. 글은 꼭 무언가에 쓸모 있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아무런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뭔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에게 성실하기 위한 마음으로 써 내려간 기록이 그 어느 과학 기술이나 캠페인보다 더 직접적으로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얼마 전 이런 기사를 읽었다. 사천에서 죽방렴 어업을 하는 어부 김정판 씨가 죽방렴 근방에서 발견되는 해양 쓰레기를 매일 사진과 글로 기록했다. 물때에 따른 쓰레기의 종류와 수량 등을 상세히 기록한 지 4년쯤 되자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유독 쓰레기가 많아지는 날의 해수면 높이가 일정했던 것이다. 어장 근처와 해안가를 돌며 그 이유를 조사하던 김정판 씨는 마침내 죽방렴 원리를 이용한 해양 쓰레기 포집 장치 기술을 개발했다. 그는 기술의 특허 사용권을 국가에 넘겼으며 이 기술은 관내 시범 사업으로 선정돼 조만간 가동 예정이다.

 

어부 김정판 씨는 매일 성실히 기록하면서 자신이 해야 할 귀중한 일을 발견했다. 세상에 내 할 일이 있다는 것만큼 뿌듯한 일도 없다. 우리는 저마다 고유한 신비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발견하기란 도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삶이 마치 강물처럼 쉬지 않고 흘러가기 때문에 잠시 멈춰서서 들여다보지 않는 한 그 안에서 뭔가를 찾아내긴 불가능에 가깝다. 이때 기록과 일기는 나조차 발견하지 못했던 내 삶의 신비를 발견하게 한다. 삶의 축제와 비탄의 순간을 동일한 무게로 바라보고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 준다. 여기보다 더 나은 곳, 완벽한 삶에 가닿으려고 애쓰기보다 그날그날 하느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일에 몰두하게 한다.

 

매일 일기를 쓴다고 해서 오랫동안 껴안고 있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일기를 쓴다고 해서 갑자기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루의 어떤 순간을 포착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 쌓이면 그 자체로 위안이 된다. 더불어 조금 더 지혜로워질 수 있다. 다가올 날들에 올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이끄는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 이 주제가 흥미롭다면, 더 읽어 보기

 

 


 

*다음 화에서는 권투에서 발견하는 글쓰기의 원리를 살펴봅니다.

Profile
cpbc 라디오 작가. 라디오 작가가 된 이후 10년 넘게 매일 글을 써 왔습니다. 글쓰기는 때로는 숨 막히게도 하고, 때로는 유일한 숨구멍이 되기도 했습니다. 글을 통해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은총의 순간들을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글을 쓰건 쓰지 않건 은총은 주어지겠지만, 내가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사는 삶보다 훨씬 낫다고 믿습니다. 여전히 글쓰기는 매혹과 두려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지만, 제 글을 통해 글쓰기에 매혹되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입니다.

다른 분들이 함께 본 콘텐츠

시리즈2개의 아티클

쓰는 사람, 쓰는 기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