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기 전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대한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세례 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은 매년 주님 부활 대축일 파스카 성야 미사 때 ‘세례 예식 갱신’을 통해 거듭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원과 정체성은 무엇보다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을 통해 확인되고 드러납니다. 오늘 대축일 미사 감사송(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의 신비)에서는 교회가 믿고 고백하는 삼위일체 신비에 대한 핵심 내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
우리는 가끔 축구 경기나 테니스 경기에서 선수들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며 잠시 몸을 낮추어 손으로 땅을 짚은 다음에 이마와 가슴과 양쪽 어깨에 십자 모양을 긋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접전을 벌인 후에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이마와 가슴과 양쪽 어깨에 십자 모양을 긋고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리는 선수들의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선수들의 이런 제스처는 인기몰이를 위해 관객에게 보여 주는 세레모니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이 작은 행동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특별한 정체성을 지녔음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에 속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표지이지요.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고 마칠 때 손을 들어 이마와 가슴과 양쪽 어깨에 십자 표지를 긋습니다. 이 십자 성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인류를 구원하신 사건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즉 하늘과 땅의 모든 것을 창조하신 성부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신 성자, 그리고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성령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십자 성호를 긋는 이들은 이 작은 몸짓을 통해 자신이 받은 세례를 기억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그리스도교(가톨릭) 신자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 2157항은 십자 성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면서 긋는 십자 성호로써 자신의 하루와 기도와 활동을 시작한다. 세례받은 이는 하루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바치며, 자신이 아버지의 자녀로서 성령 안에서 행동할 수 있게 해 주는 구세주의 은총을 청한다. 십자 성호는 유혹과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를 굳세게 해 준다.”
여러분들은 십자 성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기도를 시작하고 마칠 때 하는 예식 행위 정도로 여기고 있지 않나요? 하지만 우리가 이마와 가슴과 양쪽 어깨에 긋는 십자 표지는 결코 하찮은 행동이 아닙니다. 십자 성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를 끊임없이 새롭게 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을 굳건하게 해 줍니다.
이 작은 몸짓은 우리를 삼위일체 하느님의 보호 아래 두는 구원의 행위이며, 우리를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 안에 묶어 주는 사랑의 행위입니다. 신앙 고백의 표지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신성한 생명의 신비를 깨닫도록 이끌어 주고, 세상을 향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드러내 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2023년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여 나누어 주신 말씀에 다시 한번 귀 기울여 봅시다.
“십자가를 우리 몸에 그려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정도로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셨는지를 기억해 주십시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을 증거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친교를 이루어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거합시다. 이를 위해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십자 성호를 정성껏 긋는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